나의 꿈은 어떤 색깔 일까.....
나는 30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어릴 적 나의 꿈은 항상 교사라고 말해 왔다. 하지만 나의 꿈은 미대를 가서 자유로운 무언가를 표현해내고 싶었으나 우리 집이 가난하여 나는 미대를 꿈꿀 수 조차 없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였으나 그 당시 가난하고 공부 잘했던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학비가 전혀 들지 않는 교대였다. 시골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도 교대를 진학하였고 나는 오빠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그나마 학비가 저렴한 지방에 있는 공립 사범대학교를 선택하였다.
부모님은 학비를 4년 동안 대줄 수 없으니 오빠처럼 공무원 시험을 치라고 하셨는데 열심히 하여 장학금을 받든 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마련하겠다고 간절히 매달려 입학금을 해 주셨다. 오빠도 안 간 대학교를 아들도 아닌 딸이 가겠다고 우기니 부모님도 난감해하셨으나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다.
사실 초등학생의 천진하고 활달한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고 그럴 거면 교육학을 전공하여 교육행정으로 나가고 싶었다. 너무 진로에 대하여 무지했었던 나는 교육학을 전공하면 중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이 된다는 것을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도 진로교육은 오직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에 집중되어 있어서 학생들의 꿈이나 장래 진로에 대한 상담도 없이 오직 점수에 따라 대학교를 선택해서 사범대학교에서 내가 선택하고 싶은 교과가 별로 없었고 나는 학생들 앞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무지했던 나 .... 그래서 대학교에 들어갔다는 자부심을 뒤로한 채 부모님의 강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 만에 휴학계를 내고 시골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택의 귀로에 선 날 나는 바다를 보러 갔다.
삶을 계속해야 할지도.. 그렇다고 탄탄대로의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닌.. 먹고 살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먹먹함이 바다의 먹빛에 스며들었다.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은 교사로 정했고 그렇다면 뭔가 특별한 경험으로 나의 삶을 채우고 싶었다.
그냥 하루하루의 시간에 메이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뭔가 특별한 것으로 포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골집에 내려와 다시 예비고사 칠 준비를 하고 갈 대학을 정했다.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 대구에 있는 특수교육과가 있는 대학... 이곳은 전기가 아닌 후기 대학으로 그것도 사립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하여 장학금을 받고 다니겠고 먹고 살 돈만 대출이라도 내서 해주면 평생 갚겠다고 한 일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난 평생 부모님께 그 빚을 갚아야 했으니까.....
시골집 작은 방에 틀어박혀 느슨한 공부를 하다가 답답하면 들판과 산길을 쏘다니고 몰래 이웃동네 농사짓는 사내를 훔쳐보기도 하다가 밤에 쏟아지는 별빛을 보며 '잘 살 수 있겠지...' 모호한 내 미래에게 말을 걸어 보곤 했다. 졸업한 고등학교에 다시 가서 원서를 쓰고 예비고사를 봤는데 작년과 동일한 점수 ... 전기 대학에는 응시를 하지 않고 후기 대학인 삼류대학에 서류를 내고 면접을 봤는데 면접관 교수님이 왜 특수교사가 되려고 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 새끼손가락이 짧아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일, 오빠가 장애 아닌 장애를 가지고 힘들게 사는 일 들을 말하며 그들의 삶에 동참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사회복지사도 생각해 보고 재활원을 방문했을 때 너무 힘들어 보이는 그들의 삶에 걸어 들어가기 싫었다.
같이 국민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닌 같은 나이의 이종사촌은 가족의 반대로 서울에 올라가 취직이라는 것을 했고 나는 대학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들의 삶은 30년 후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고집스럽게 선택했던 대학이라는 문이, 특수교육과를 선택했던 나의 결정이 내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로 30년이 지난 시간들에 자유함과 자긍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선택이란...스스로를 주장하는 내 삶을 내가 결정짓는 나를 책임지는 일이 되었다.
나는 특수교육과의 차석으로 입학하여 1년 장학생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시골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의 대구는 시골 생활만 한 나에게 거대한 공룡처럼 다가왔고 집을 구하고 세간을 장만하고 집에서 독립한다는 느낌이 마냥 좋은 나는 설렘의 대학생활을 꿈꾸었다. 딸아이 혼자 외지에 보내는 것이 불안한 부모님은 같은 대학 다른 과에 입학한 고등학교 동창과 같이 방을 얻어 주었고 경제적 부담도 반으로 줄였다.
처음으로 집 떠나 독립한다는 설렘은 다소 불안으로 자리했지만 나는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고 대학생이 된 것이었다. 짐을 싸서 떠나는 딸아이를 보내는 엄마는 항상 울고 계셨다. 4년 내내 반찬을 들려 보내며 울고...나중에 직장을 얻어 나가서 방학 때 다녀 갈 때도 엄마는 개울가 나무 아래서 손 흔들며 우셨다.
나의 대학생활은 수줍음으로 시작했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장학생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항시 자리하고 있어 주로 도서관을 많이 이용했다. 첫 과 환영식에 파란 옷을 입고 구석에 앉아 수줍게 웃음을 짓던 사진이 나였음을..... 1학년 때는 그 흔한 그룹 미팅도 해보고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남학생의 편지도 받고.... 나는 한 번도 길게 길러보지 못한 한을 풀 듯 머리를 길러 유행하던 부메랑 파마를 하고 청바지를 입고 손에 책을 끼고 다녔다. 그게 대학생인 나의 모습이었다.
1학년 때는 대부분 교양 수업이었고 전공은 특수교육개론이 있었는데 특수교육계의 선두이신 김 교수님의 원서 강의였다. 1학년에게 원서를 던져주신 교수님...나는 두꺼운 원서에 빠져 매일 사전을 찾아 해석에 재미를 붙여 그 수업에서 거의 만점을 받아 A+를 받고 교수님의 눈에 들게 되었고 교수실에 있던 고등학교 선배의 추천도 있었지만 2학년부터 3학년까지 김 교수님 연구실의 보조 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대학원생 선배가 이미 있었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대부분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전화도 받고 리포트도 받고 교수님 심부름도 하면서 대학원 선배의 원서도 번역해주고....맛있게 커피 타는 법도 교수님께 직접 배우고 연수회도 따라다니며 나름대로의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1학년 가을쯤 나는 항상 검정 옷의 우수에 찬 야간 수업을 듣는 같은 과 남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왠지 곁에 있어 위로가 되어 주고 싶은... 밥을 사주고 싶은...쓸쓸함이 무기인 것만 같은 동갑의 남학생...기타를 치며 대학가요제 곡을 직접 만들고 대학 부속 특수학교에서 자원봉사하고 밤에 수업을 듣는... 그때 먼저 말을 걸어왔고 문학청년이어서 동화를 쓰고 자기만의 꿈을 가진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 특별한 재능에 이끌려 교내 커플이 되었다. 11월 11일 밤에 한 첫 입맞춤을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했었다.
나는 연애에 빠졌던 한 학기를 제외하곤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생활을 했고 아르바이트 대신 교수실 보조 학생으로 비교적 성실한 학생이었다. 대학 내 부속 특수학교에서 교생실습도 하고 그곳에 자리가 났었는데 그곳은 사립이어서 여자는 결혼하면 그만두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나의 새로운 인생인 직장생활을 고향에서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었고 대부분 친구들은 서울이나 경기지역에 시험을 쳤지만 그 당시 내 부전공(특수교육 중등이라 부전공에 따라 뽑는 불합리성은 여전히 지금까지 존재한다)에 맞는 시험 공고가 난 곳은 서울과 경기, 전라도, 강원도, 부속 사립학교여서 같은 부전공의 친구들과 상의하여 나는 가장 먼 강원도를 선택하였다.
또 한 번의 나의 선택이 강원도가 제2의 나의 고향이 된 것이다.
30년을 살았으니....
대학교수님이 추천서를 써 주셨고 나는 내가 원하는 춘천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시골집에서 버스를 타고 김천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 후 지하철을 타고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거의 하루가 걸리는 처음 가보는 춘천은 그렇게도 먼 곳이었다.
첫 발령을 받은 곳은 아직 초기 단계의 특수학교여서 교사들은 돌아가면서 학교 통학버스의 보조원을 해야 했고 수업 후 삽과 리어카로 학교 조경 사업에 참여해야 했다.
삼십 년 전 그 시절은 그랬다.
처음 부임받은 새내기 교사인 나는 고등부 과정이 아직 없어서 중1 담임을 맡고 교사생활을 시작하였다.
보통 특수교사는 사명감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아이들과 잘 놀아 주는 것이 좋았다. 아이들은 내게 쉽게 다가왔고 진심을 다해 주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좋았다. 내가 맡은 아이들은 지적장애와 정서장애를 가진 아이들...그러나 맑게 웃어 줄 수 있는 아이들....그 아이들도 이제는 나이 먹고 결혼도 하고 엄마도 되고 혹은 재활원에서 흰머리를 보이며 같이 나이 먹어가는 맑은 아이들.... 요즘도 가끔씩 전화나 메시지가 온다.... 사진과 함께...
"선생님, 저 은영인데요.."
"잘 있었어 ?"
"네, 보고 싶어요. 선생님'
나는 어른이 된 아이들에게도 언제나 선생님으로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