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 춘천에서의 10년
초보교사라는 설레임과 한편의 두려움,
낯선 장소에서의 새로운 인생의 시작,
매일 매일 수업 준비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에 매일이 바빴다.
지역이 낯설어 방을 구한 곳이 학교와 버스로 한시간 거리의 아파트와 시장이 있는 주변이었다.
9시 출근 6시 퇴근. 그러면 거의 7시에 집에서 나와서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고 돌아 시골에 있는 특수학교로 가서 수업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맞고 수업을 하고 아이들을 통학버스에 태워 보내고 또 다음날의 수업 준비를 하고 늦게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를 돌고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나날의 연속이 반복되었다.
긴장으로 녹초가 되고 힘든 나날들 이었지만 나는 젊었고 나를 선생님으로 불러 주는 아이들의 눈빛과 마음이 좋았으며 혼자 드디어 자립했다는 그래서 월급도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초보교사로서 한 달 되던 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일반학교에서 전학 온 여학생이 처음 등교한 날, 밤 10시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장애가 있는 학생이 혼자 집을 못찾아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것을 발견했다고... 그 학생의 가방에 있는 알림장에 담임 전화번호가 있어 전화드린다고... 그때는 핸드폰이 없이 세들어 사는 주인집으로 전화가 왔었다.
밤 10시 급하게 택시를 잡아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은미는 시골에 살았는데 편마비와 지적장애가 있어 일반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다가 특수학교가 있는 오빠가 사는 춘천으로 왔다고 한다. 등교 첫날 통학버스에서 내렸는데 낯선 곳이다 보니 집으로 가는 방향을 잘못 찾아 밤중까지 헤매고 다녔나 보다.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
나는 아이들에게 매일 집으로 알림장을 써 준다. 아이들이 소통능력이 미약하여 부모님께 전달사항이나 연락이 필요한 사항들을 매일 적어 보내곤 했는데 은미가 전학온 날 알림장을 가방에 넣어 주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공중전화로 은미 집에 연락하니 오빠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마도 찾아다니고 계신가 보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은미가 불편한 다리로 뛰어와 울면서 나에게 안긴다.
괜찮다고 등을 토닥여 주며 우선 배고를 것 같아 먹을 것을 사준 후 통학버스 내린 곳에서 부터 천천히 집 찾기가 시작되었다.
"은미야, 우리 천천히 집 가는 길을 가보자. 선생님은 너의 바로 뒤에서 따라 갈께"
은미는 그제사 안심이 되었는지 두리번 거리더니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이제사 생각이 나는 듯 큰길을 따라 걷다가 골목길로 들어서고 모퉁이를 돌자 "선생님 여기가 우리집이예요" 하고 큰소리로 외친다.
정말 눈물나게 고마운 순간이었다.
오빠와 새언니도 은미를 찾다가 이제사 들어온 듯 은미를 반겨준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훌쩍 넘었다. 초보교사로서 힘들고 긴 하루였지만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큰 사건이었나 보다.
은미는 얼마 있지 않아 학교 근처에 있는 재활원으로 들어가고 재활원에서 특수학교로 통학하게 되었다. 재활원을 방문할때면 제일 먼저 "선생님" 하고 반갑게 뛰어와서 안기던 아이 . .
아직도 은미는 재활원에서 생활한다. 재활원이 은미의 평생 집이 된 것이다.
내 나이 25살에 만난 아이, 은미는 14살 이었고 우리는 11살 차이였다. 이제 머리에 흰색도 많아지고 같이 늙어 가는 처지가 되었다. 제주에 오기전 재활원을 마지막으로 갔을때도 은미는 언제나 환하게 반겨주었다. 은미는 나를 선생님으로 영원히 기억하는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났던 아이들은 거의 졸업할 때까지 6년을 보게 된다.
한 반에 학생이 11명 이어서 학기 초에 가정방문도 하고 같이 점심도 먹고, 매달 현장학습도 가고 아이들 보내고 남은 시간은 다음날 수업 준비를 했다.
학교 가까운 곳에 재활원이 있어서 통학버스를 타고 많은 아이들이 등교한다. 우리 반에도 재활원에 사는 아이가 서너명 되는데 그중 한 아이를 잊을 수 없다.
꼭 까치를 연상하는 머리에 뀅한 눈, 깡마르고 언제나 맨발이었던 늑대 아이를 연상시키던 소년. 재활원에 가정방문 했을 때, 사실 좀 놀랐다.
한방에 10명이 넘는 아이들이 살고 있었고 그곳 선생님을 엄마라고 부르며 차가 오면 모두 우르르 현관으로 몰려나와 관심을 가진다.
나는 매년 가정방문으로 두번 이상 재활원을 방문했고 학생에게 문제가 생기면 보호자를 부르거나 통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한다.
소년은 먹는 것에 한이 맺힌 거 같아 보였다.
먹어도 먹어도 양이 차지 않아 언제나 배고프다고 말하고 가사실습을 할때면 소년의 눈빛이 빛나곤 했다. 그래서 출근할 때 일부러 빵을 사가지고 가서 먹여 보기도 하고 내 밥을 덜어 주기도 했는데 금새 먹어버리고는 배고픈 눈빛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찌 않는다고 했다.
소년은 친해졌다고 지나가거나 앉아 있으면 슬거머니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나를 툭 치고 간다. ㅎㅎㅎ
'이 소년의 배고픔은 어디서 온 것일까 ?'
'내가 살던 세상하고는 너무나 달랐던 한 세상이 여기에 있구나'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돌보기가 어려워져 거의 이곳에서 평생을 살게 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고 가슴이 아팠다. 원장님이 아빠가 되고 방 선생님이 엄마가 되는 사생활이라고는 보장되지 않고 공동생활만 허용되는 곳인데도 아이들은 친구가 있고 엄마 아빠가 있어서 좋다고 한다.
이 아이들의 미래는 어떤 색깔일까 ?
꿈은 꾸라고 있지만 이 아이들의 꿈은 어디쯤 있을까 ...
현재 그곳은 아이들의 재활을 위해 보호작업장도 만들고 그룹홈도 만들어 가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나에게 한 아이 한아이 모두 소중했지만 그래도 잊지못할 여학생 4인방이 있다.
나하고 나이 차이가 10살 밖에 나지 않아 동생 같았다. 다행히 그 아이들 중 3명은 특수학교 고등부를 졸업 후 취직했다가 결혼을 해서 아이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특수교육의 꽃은 직업재활이라곤 한다.
잘 키워내서 떳떳한 직업을 가지고 사회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이 내 책임과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직업교육과 사회적응훈련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수업 후 우리집에서 김치담기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같이 했다.
지역사회 기관과 연계하여 학원도 보내고 고 3 때는 현장실습으로 졸업때 서울로 취업도 보냈다.
결국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졸업식때면 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12년간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결국 방구석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앞에서 정말 절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난 직업재활과 아이들이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하게 되었다.
한사람의 특수교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