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모르는 사람도 거의 없을뿐더러 드라마로도 여러 번 제작되는 등 현재 기성세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익숙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너무 어릴 때라 전혀 몰랐던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배우 유해진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출연한 드라마로 남아 있는 작품이 바로 2004년 SBS에서 동명의 드라마로 방영된 작품이며 당시에 악역 연기를 굉장히 치졸하고 악랄하고 얄밉게 잘해서 굉장히 유명했다고. 성인이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먼 뉴비로서는 흥미롭게 다가오는 점이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임꺽정>, <장길산>, <지리산> 같이 유명한 대하소설들이 많지만, 박경리 소설가의 <토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1969년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 완성될 때까지 25년의 세월을 거치며 암 투병을 하면서도 펜을 놓지 않고 여러 번 연재처도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 현대 문학 최대의 문제작으로 남은 작품. '이제부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의 것을 모두 습작이라 한다.' 라는 말을 남긴 작가가 자신의 일평생을 바쳐 탄생한 이 작품을 생각하면 읽어보았든 혹은 읽어보지 않았든 그 사실만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에 접근하기를 방해하는 커다란 장애물은 바로 분량. 200자 원고지 기준 3만 장을 넘어가는 소설을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특히 굉장히 가혹하다고 할 수 있다. 모 방송에 나왔던 일화로 김영하 작가나 정재승 교수도 이 위대한 작품에 도전했지만 실패하였고, 유시민 작가는 처음 읽었던 때가 바로 자신이 징역을 살았을 때라고 한다. 그리고 꼭 이러한 대하소설이 아니더라도 드라마나 영화를 넘어서 개인적인 컨텐츠가 물 흐르듯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책이라는 매체가 살아남기에 상당히 힘들어지지 않았는가.
작년에 <토지>의 신판이 펀딩을 통해 출시되었다. 표지 또한 따로 투표해서 필자도 한 표를 행사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당시만 해도 지금 이 책을 읽고 있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비싸더라도 펀딩도 참여하고 종이책으로 편하게 읽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학교도 휴학에 준하는 상태로 쉬고 있고 해서 이번 기회에 넉넉해진 시간을 이용해 전자책으로나마 도전해보고 있는 상태이다. 다행히 공부하면서 활용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태블릿 PC를 통해 널찍한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기에 망정이지,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보려고 했으면 진작 포기하지 않았을까. 현재는 마로니에북스에서 발간한 2012년판을 기준으로 1부에 해당하는 1~4권은 모두 읽었고 5권을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 상태이다.
일단 처음 읽을 때는 확실히 문체나 사투리가 익숙하지 않아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경상도 사람이라서 경상도 사투리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읽는 도중에도 책 뒷부분에 어휘풀이가 있는 단어는 그곳에서 의미를 찾아보기도 하고 또 모르는 단어는 인터넷에도 찾아보는 과정을 계속 거치느라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래도 1장을 다 읽어갈 때쯤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서 독서에 속도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2장으로 접어드니 배경이 간도로 이동하면서 웬 이북 사투리가 나오긴 하지만...
1장을 읽으면서 느낀 <토지>의 특징은 역시 대하소설답게 등장인물이 굉장히 많다는 점. 이 점도 초반에 읽는 과정에서 꽤나 걸림돌로 작용한다. 머릿속으로든 종이로든 어떠한 수단으로든 정리를 해가며 읽어야 가족 관계나 사람 간의 관계 파악이 가능하지 대충 읽다가는 누가 누군지 다 섞여서 구별하기도 상당히 힘들다. 그래도 각 중요 인물들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어 자연스럽게 그 속에 녹아들면서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본격적인 이야기 전개는 어느 정도 받아들인 다음에 진행되는 느낌이라 독서 과정에서 지속성을 가진다면 난이도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또 하나 느낀 것은 인물들이 굉장히 입체적이다. 보통 지나치게 선역이나 악역인 인물이 있으면 평면적으로 느껴지면서 이야기의 매력이 떨어지는데, <토지>에서는 악인도 나름의 이유 또는 변명거리가 있으며 딱히 선이라고 꼽을 만한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대놓고 악한지 조금 덜 악하거나 선악이 공존하는지의 차이랄까? 그러다 보니 누가 잘 됐으면 하고 응원하게 되지도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흘러가는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각자 다른 상황과 위치에서 나타내는 바는 다르지만 그 각각의 삶이 한데 모여 인간의 특징을 말하는 듯한 부분이 굉장히 현실적이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또한 역사 시간에 구한말의 생활사나 신분제 철폐로 인한 계급 인식의 과도적인 변화와 같은 이야기를 배우기는 했으나 단편적으로 들었을 뿐 자세하게는 모르고 지나갔는데,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점들이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당시 삶의 모습과 사람들의 인식 혹은 태도를 간접적으로나마 머리와 마음속에 확 와닿게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다독을 하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고 종종 가뭄에 콩 나듯 짬이 나는 시간에 책을 잠깐 보는 정도라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도전이었는데, 어느 정도 읽다 보니 흥미도 생기고 앞으로 발생할 사건들에 대해서도 계속 궁금해진다. 물론 시간이 많이 나는 상황이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지금이 아니면 평생 도전도 못 해보지 않을까?' 하고 약간 충동적으로 도전해 본 터라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완독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진행해 나갈 생각이다. 4월 16일부터 시작해서 약 2달 동안 4권을 읽은 셈인데, 일단 연말까지 다 읽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상태이다. 문학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으며 한국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토지>, 혹시 고민하고 있다면 한번쯤 시도해 보기를 추천한다. 혹여 실패하고 무모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의미를 지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