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아' 한 잔이면 충분한 화해

화해를 부르는 마법의 갈색가루

by 카타

자라고 보니 나는 아빠였다. 성격과 취향, 가치관이 꼭 닮은 아버지의 판박이.


사춘기 시절, 아빠와 참 많은 이견 다툼이 있었다. 지금은 생각나지도 않는 시시콜콜한 일들에 대한 입장차이다. 지금의 나라면 <아버지, 당신 말이 옳아요.>라고 적극적인 공감을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와 큰 소리로 다툼이 시작되었다. 무슨 일이었을까. 우리는 서로의 말이 옳다고, 내 말 좀 먼저 들어보라고,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소리에 묻힐세라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듣는 사람도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나 보다. 아무 적대감도 없는, 생산성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소동 중에도 우리는 알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참 소중한 존재라는 걸.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마음 편하게 싸웠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갈 때쯤 아버지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그렇게 나는 별 것 아닌 일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웃음을 멈춘 아버지가 툭 던진 한 마디 말이 내게로 굴러온다.


"너는 어쩜 그렇게 아빠 어릴 때랑 똑같냐."


갑작스러운 아빠의 말 한마디에 나는 무연해졌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더미에 양동이로 물을 확 뿌려버린 것처럼 나의 화는 애초에 타오른 적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꺼져버렸다.


그때까지 나는 아빠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없다. 집안팎에서 나는 엄마를 닮은 딸이었다. 외모가 엄마를 꼭 닮았기 때문에 당연히 성격도 엄마를 닮은 딸로 인식되었다. 아빠도 늘 엄마를 닮은 딸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빠는 마치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둔 말처럼 <니 고집을 내가 잘 알고 있었지. 너는 나를 닮은 딸이니까> 하는 무언의 표현으로 긴 시간 당연하게 받아들인 나에 대한 정의를 바꿔버린 것이다.


나는 화를 내던 입을 다물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무슨 화제로 아빠와 이견다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그때의 내 기분만큼은 정확히 기억난다. 마음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비록 이견의 격차를 좁히진 못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을 꼭 닮은 딸을 위해 늘 그렇게 낮은 자리로 내려와 주시는 분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아버지를 닮은 딸로 다시 정의되었다. 아버지를 나로 치환하고 생각해 보니 행동 하나, 말투 하나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강강약약(강한 사람에게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 약한)의 아버지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이없는 일에는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지만 가끔은 속 모를 정도로 한정 없이 관대하다. 모르는 척하지만 섬세하다. 더없이 따뜻한 것 같지만 뒤끝 없이 과감하기도 하다. 이런 상반된 수식어가 우리는 잘 어울린다. 그러니 우리는 불같이 부딪혔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편이 되고 서로를 열렬히 응원한다. 같은 편이기 때문에 더 치열히 고민하고 부딪치지만 아버지의 말도 옳고 내 말도 옳다는 것을 깔끔하게 인정한다. 우리는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가끔은 지나치게 얼렁뚱땅하기도 하다.


그래도 살면서 또 다른 이견차이가 없을 리 없다. 나는 더 이상 사춘기 소녀처럼 아빠를 이기려 들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입을 닫는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나의 닫힌 방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코코아 있니?"

나는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코코아를 위한 물을 끓인다. 두꺼운 머그컵에 코코아 몇 스푼을 넣고 끓인 물을 붓는다. 코코아가 잘 녹도록 열심히 저어준 후 아버지가 앉아 있는 책상에 조용히 코코아가 담긴 머그컵을 내려놓는다.


나를 힐끔~ 곁 눈으로 쳐다보며 눈치를 살펴보는 아버지는 씨익~ 특유의 미소를 띠우고 말한다.

"아빠 핀잔주지 말아~"


아버지는 코코아를 요청하는 것으로 화해를 청하고, 나는 코코아를 대령하는 것으로 답한다. 가끔은 코코아가 라면이 되기도 한다. 라면 있냐는 화해 요청에는 라면으로 답하곤 했다.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버지이기에 가능한 화해 방법이다. 그렇게 코코아 한 잔, 라면 냄비를 앞에 두고 우리는 속에 있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때의 우리는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다정한 부녀지간이 된다. 그렇게 매일이 반복된다.






우리는 더 이상 화해할 일이 없다. 크고 작은 이견 차이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되었다. 순간순간 가치를 인정받고자 고집부렸던 생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떤 생각인지,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조차 없이 증발해 버렸다.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유전자를 나눠 받은 언니와 어쩌면 당신의 선물이었을지 모르게 우연히 가족이 된 고양이 한 마리, 당신을 꼭 닮은 성격의 나, 그리고 당신이 남기고 갔다고 믿는 온전한 사랑과 경험, 기억들이다. 그것으로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는다.




2017년 스위스에서의 카푸치노. 코코아만큼 진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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