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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모험가 Apr 18. 2017

도쿄에 두고 온 마음  

한겨울, 도쿄의 기억 - 1

여행의 참맛은 우연에서 시작된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

그렇기에 나의 여행엔 늘 우연이 들어올 자리를

비워두곤 한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도 우연은 여지없이 내 여행의 한 가운데서 날 이끌었다.

근 10년 만에 혼자 떠나는 도쿄, 여행보단 잠시 머무름이란 표현이 더 적확할지도 모르는 장기 여행.

9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홀로 졸업 여행을 떠났던 그 순간처럼, 늘 위시리스트에만 담아두었던 에어비앤비를 선택하고 캐리어의 네 바퀴를 도륵도륵 굴려가며 나는 도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그저 도쿄에 머무르기 위한 떠남이었다.


내가 선택한 숙소는 도쿄 시내에서는 제법 먼,

주택가의 작은 동네였다.

생경한 역 이름과 풍경, 9년 동안 여러 번 도쿄에

왔지만 가장 깊숙이 도쿄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낯선 두근거림에 퍽 설렜다.

겉으로 보기에도 제법 오래돼 보이는 집,

작게 나 있는 창문으론 따뜻한 불빛이 비쳐 나온다.

이곳이구나, 나의 짧은 도쿄 살이의 쉼터가.

호스트 후코의 집은 아담한 2층 목조 주택으로,

움직일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나무결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오래전, 시골집에서 까치발을 들고 마룻바닥을 종종 거리며 노닐던 생각이 났다.

낯설지 않은 나무결의 음색, 이내 익숙해진 그 소리.  

다용도로 쓰이는 1층 공간에선 모두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되곤 했다.

여러 게스트들이 한 집에서 지내는 이곳은 일본, 홍콩, 말레이시아, 중국 등 다양한 국적이 혼재했다.

그들은 거의 짧은 일정으로 관광을 오는 여행자들이었기에, 아쉽게도 아침 식사 시간 외에는 크게

마주칠 일이 없었다.


매일매일 빡빡한 관광 일정으로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귀가하던 그들과는 달리, 매일 아침마다 그날의 행선지를 정하고 느긋한 걸음을 옮겼던 나는

왕왕 후코의 아침식사 준비나 설거지를 도왔고,

그녀는 종종 답례로 향긋한 커피를 내려주었다.


매일 아침마다 후코는 게스트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해주었고, 우린 통통통 경쾌한 그녀의 칼질

소리에 아침을 시작했다.

그녀의 고향 홋카이도에서 보내온 신선한 채소로 요리하는 음식은 담백하고 소담스럽다.

그녀의 요리로 든든하게 채워진 아침의 에너지로 시작한 하루는 늘 온전할 수밖에.


때때로 오후에 집에 들어왔을 때 후코의 친구나,

함께 살고 있는 후코의 동생 케이나의 친구가 와있기도 했다. (홋카이도에서 부모님과 농사를 짓고 있는 후코의 동생 케이나는, 농사를 쉬는 겨울이면 도쿄에 머무른다고 했다.)

 늦은 오후,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들어온 집에서 따뜻한 빛이 새어나올 때, 나도 모르게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며 집에 들어올 때, 여기가 정말 집인 것만 같아 마음을 놓아버리곤 했다. 

어린 시절, 맞벌이로 늘 바빴던 엄마가

간혹 오후에 집에 계실 때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 현관을 열고 들어갔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엄마의 온기에 눈물 나도록 기뻤던 그 시절의 기억처럼 반가웠던 후코 집의 온기.

후코와 케이나, 그리고 케이나의 친구 세레나에게서 들은 그들의 고향 홋카이도의 이야기, 내가 들려주는 한국의 이야기, 익숙한 이야기들을 생경하게 받아들이는 서로가 재밌어 또 웃는 우리. 어쩌면 처음 만난 서로에게 누구에게보다 더욱 마음을 열고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지도 모르겠다.


낯선 언어로 읊조렸던
그 날 밤의 이야기들이, 말이다.



* 글 : 블리
www.instagram.com/bliee_

* 사진 : 빅초이
www.instagram.com/big.bigchoi

*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소로소로
www.soro-soro.com

라이프스타일 포토그래퍼인 빅초이와 <시작은 브롬톤>을 쓴 작가 블리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생활모험가 부부입니다.
일상과 여행, 삶의 다양한 순간을 남편 빅초이가 찍고, 부인 블리가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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