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이방인의 마음까지 녹여주었던 따끈한 기억
여행자 생활 5일째 접어들던 어느 날의 오후.
하나 까다로울 것 없던 나의 입도 조금씩 까끌해지고, 의무적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만 같은 무중력의 시간이 오후 내내 이어졌다.
먹으려던 오므라이스는 고민하는 중에 판매종료가 됐고, 잠시 쉬었다 가려던 카페는 테이크아웃 줄도 어마어마했다. 빈속에라도 카페인이 간절했지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슈우웅 뭔가가 내 안에서 빠져나갔다. 채울 틈도 주지 않고 자꾸만 빠져나가기만 했다.
안되겠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겠어.
이제는 집처럼 익숙해진 숙소로 돌아가는 길.
그리고 한낮이라 아무도 없는 집.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어둑해진 시간에 들어오는 것이 익숙해, 이렇게 한낮의 풍경은 처음이다.
잠들기엔 너무 이른 시간.
찰방찰방, 따끈한 목욕탕에 가야겠다.
호기롭게 나섰지만, 사실 일본의 동네 목욕탕은 처음이다. 호텔이나 리조트에 있는 대중탕은 가본 적 있지만, 동네 목욕탕에 가는 건 처음. 친구 후코가 준 동네 목욕탕 지도를 펼쳐보았다. 약 10개 가량의 동네 목욕탕은 각자의 개성이 뚜렷했다.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한 곳, 시설이 아주 잘 갖춰진 곳, 하지만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장 오래된 -후코 말로는 ‘구식 목욕탕’인- ‘다나카유’ 였다.
매일 지나던 길에서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니 있던 그곳. 시설이라고 해봤자 탕과 세면대 뿐이었지만, 지친 여행자에겐 목욕탕의 따끈한 온기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오래된 목욕탕이다 보니,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동네 목욕탕이라 모두가 아는 얼굴들일텐데, 딱 봐도 일본인은 아닌 젊은 여자애의 등장으로 목욕탕의 시선은 일제히 나를 향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불편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시선이 경계의 시선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
탕에 들어가자, 그대로 내가 녹아버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끈한 온기가 온몸 가득 퍼져왔다. 지쳐있던 마음까지 노곤노곤 위로 받는 기분.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 여행을 돌아보니,
더 머무르고 싶은 편안함과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교차한다.
한 달, 아니 몇 주 전까지도 1분 1초, 끊임없이 무언가 할 것을 요구받았고, 재촉하는 이들과 책임을 떠미는 사람들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던 나.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속에서 유영하는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아 코끝이 찡해온다. 가만히 눈을 뜨니 맞은편의 연세 지긋한 할머님께서 빙긋이 웃어주신다.
괜찮단다, 아가야. 넌 그대로도 괜찮아.
뜨끈한 에너지를 잔뜩 받고 나와, 흰 병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하얗고 차가운 에너지가 가득 차올라, 맘 속 갈증까지도 해소되는 기분.
온기로 빨개진 볼을 하고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 마냥 익숙하고도 가벼운 발걸음.
눈에 익은 이 거리를 오래오래 그리워하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 글: 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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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빅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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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포토그래퍼인 빅초이와 <시작은 브롬톤>을 쓴 작가 블리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생활 모험가 부부입니다.
일상과 여행, 삶의 다양한 순간을 남편 빅초이가 찍고, 부인 블리가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