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 vegas Again
칠월에도 쌀쌀한 아침 공기를 가로지르며 보즈먼 공항을 향해 달렸다. 도로 옆으로 아침햇살을 받아 윤슬이 반짝이는 강이 우리와 함께 달렸다. 침엽수와 강, 이 두 가지 재료로 몬테나는 두 시간의 여정이 지루하지 않도록 얼굴을 바꿔가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미국에 다녀온 후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출근하여 PC전원을 켰다. 랜덤으로 열린 몽환적인 윈도 배경화면에 마음을 사로잡혀 그곳이 어딘지 검색을 했고, 미국 몬테나주에 있는 호수임을 알았다.
어쩌면 우리가 지났던 그 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과 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주 동안의 미서부 종단, 그것이 우리의 미국여행 처음이자 마지막이리라 단언했었는데, 윈도 화면을 보며, 그 큰 세계를 보고 온 후에도 난 여전히 섣부른 우물 안의 개구리임을 깨우치곤, 사람 참 변하기 힘들다.
두둥!
우리가 보즈먼 발 솔트레이크행 비행기 좌석지정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취소표가 생길 것을 대비하여 정원을 초과하여 예약을 받은 미국항공사에 대한 스토리를 봤다. 정원을 초과하여 비행기표를 팔았고 비행기좌석보다 많은 예약자들이 공항에 왔기 때문에 항공사는 비행기표를 취소하는 사람에게 보상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취소표가 생기지 않자 강제로 몇 명을 선발했고 때문에 항공사 직원과 고객 간에 실랑이가 벌어진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 남의 일 같은 일이 나에게도 생기는 건가 조마조마한데, 인자한 할머니 표정의 직원이 우리에게 비상시 승무원을 도와 사람들을 탈출시킬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유창하냐고 물었다. 'NO'라고 말하면 탑승자 명단에서 제외되는 걸까? 이 비행기를 못 타면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 표까지 보상을 해주는 건가? 설마 비행기 사고가 날까? 그 짧은 순간,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에 쥐가 나려 했다.
"NO."
다행히 인자한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우리에게 탑승권을 건네며 탑승구를 안내해 주셨다.
'출근길 클라스 보소'
전 세계하늘을 누비는 파일럿은 출근길부터 남달랐다. 누군가에게 회사버스가 있다면 누군가는 비행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어쩌면 미국 출퇴근 스케일이 남다른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 내 눈에 띈 그의 사내연애에 대해 살짝, 간만 치듯이 적어보려 한다.
게이트 대기실에 앉아 책을 펼쳤다.
맞은편엔 나중에 알고 보니 조종사였지만 처음 봤을 땐 군인인가 했었던 제복을 차려입은 준수한 총각이 각을 잡고 앉아있었다. 비행기가 도착했는지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사이로 승무원이 달려 나와 앉아 있는 조종사의 목에 팔을 감았다.
'엉?! 책 보다 더 재미있겠는데!'
잔망미 뿜어내며 반가워하는 승무원에 비해 조종사는 과묵했지만 사랑이 가득 담긴 눈은 그녀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책을 읽는 척 내 코앞에서 실시간으로 방영하는 미국사내커플에 대한 로맨스 드라마에 집중했다.
비행기에서 손님들이 모두 내리고 다음 손님들 탑승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 둘의 짧은 데이트만큼 드라마도 급하게 막을 내렸다. 애교 많은 여자친구는 죽기보다 헤어지기 싫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고 남자친구는 따뜻한 미소로 답했다.
내가 미쳤나 보다. 헷가닥 했나 보다.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멜로눈깔에 내 심장이 좋다고 쿵닥거리며 난리가 났다.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었고 탑승권을 내밀었더니 남편과 난 잠시 기다려 달라는 안내를 받았다.
탑승을 거의 마치고 썰렁해진 대기실엔 우리와 그 조종사를 포함하여 몇 명이 더 있었다.
한 참 뒤 항공사 직원이 남은 사람들의 탑승안내를 다시 시작했지만 유독 나에게만 그 인자한 할머니와 같은 질문을 하였다.
이번에 'NO'라고 하면 진짜 낙오되는 건가? 고민했지만 내 입은 'Yes'를 모르는 듯, "NO."
이거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탑승을 했지만 좌석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나와 남편의 표를 받은 승무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혼자 여행 중인 여자를 지목하여 자리를 옮길 것을, please는 그저 형식으로 붙였을 뿐, 명령조로 말했다. 아마 내가 그 아가씨였다면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을 테지만 아가씨는 승무원에게 본인의 티켓을 내밀며 항의했고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천성이 을인 우리는 태워준 것만으로도 성은이 망극한 지경이라 굳이 나란히 앉을 필요는 없었지만, 승무원의 카리스마는 쓸데없이 강력했다.
유튜브에서 본 것처럼 미국 항공사 직원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손님을 강제로 하차시키거나 그런 우악스러운 일은 없었지만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부분은 사실인 듯 보였다. 그 위력으로 남의 권리를 빼앗아 우리에게 베푼 친절이 감사했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웠다.
다음 비행기 스케줄이 급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선했다. 서둘러 하선하며 그 와중에, 출입구 제일 앞, 비상구석에 앉아있는 조종사와 그 옆에 앉아 재잘거리는 승무원을 봤다.
그 순간 어떤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항공사 직원들이 남편과 나에게 영어가 유창하여 비상시에 도움을 줄 수 있냐고 집요하게 물었던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그 비행기엔 좌석이 나란히 비어 있었던 곳은 비상구석뿐이었다. 비상상황이 발생한다면 같은 항공사 파일럿이 제일 큰 도움이 되므로 응당 그 자리는 그 파일럿이 앉아야 할 테지만 만약 남편과 내가 영어가 유창해서 비상구석을 차지할 자격이 된다면 일행을 나란히 앉게 해 준다는 배려의 명목아래 그 파일럿을 일반석에 배정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항공사 직원들은 그렇게 까지 하려고 했을까?
사내커플을 응원하는 항공사에 커플은 꼭 함께 앉혀야 한다는 룰이 있어서?
아니면 업무에 집중하기보단 남자 친구에게 쪼르르 달려갈 기회만 엿보고 있는 사랑에 빠진 정도가 아니라 사랑에 질식되어 뇌마비가 온 승무원(같은 항공사 조종사의 여자친구)에게 감히 '야! 농땡이 칠 생각은 하지도마!'라고 말하기 불편해서?
아무래도 이 드라마,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다.
다음 비행기 출발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했다.
5분만 늦었어도,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에서 어리버리했어도 비행기 못 타는 건데, 무사히 탑승했다.
우리나라 공항은 출발하는 곳, 도착하는 곳이 나뉘어 있다. 미국 국내선 공항은, 아니 내가 경험한 보즈먼 공항과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은 출발과 도착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어디로 가느냐로 게이트를 구분하는 것이 우리나라로 치면 공항보단 시외버스터미널과 그 구조가 비슷하다.
비행기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면 게이트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탑승한다.
보즈먼 공항에서 내리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 승무원을 봤을 때 난 드라마만 본 게 아니었다. 솔트레이크 시티 공항에서 Departure라는 이정표가 없는 것을 보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바로 알아차렸다.
'뭐, 대~단한거 발견했네!'
누군가는 비웃으실지도 모르지만 촉박한 시간에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만 하다가 비행기를 눈앞에서 떠나보내신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이다.
때론 너무 당연한 사실과 대단한 발견은 한 끗 차이다.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에서 내가 도착한 게이트는 1번과 5번 사이, 라스베이거스로 출발하는 비행기의 탑승구는 28번이었다. 처음엔 걸었는데, 점점 속도를 올려, 나중엔 100m 달리기를 해서 거의 마지막으로 탑승을 하였다.
하루 종일 조마조마 아슬아슬한 날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온통 황색인, 고작 한 시간 만에 확연히 달라진 풍경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숨을 뱉었다.
열흘동안 갖가지 사연과 감정과 감동이 섞여 휘몰아쳤던 그 시작점으로 돌아오는데 고작 3시간 걸렸다.
공항문을 나서자마자 익숙한, 예상했었던 죽음의 온도를 품은 공기에 내 숨통이 '헉'하고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