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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이 필요할 때

그냥 혼자 내버려 두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져

by 김효정
힘들었지? 오늘 술 한잔 해야겠네?

그녀의 메시지에, 맥주 한 잔이 간절해졌다.

'그래, 오늘은 술이 필요한 날이구나.'


때마침, 기가 막힌 타이밍에 '술 한잔 하자'는 지인의 제안을 거절한 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경비실에 맡겨놓은 택배도 찾아야 하고, 밀린 빨래도 해야 하고, 이미 올라탄 지하철은 그가 만나자는 곳과는 정반대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외에도 굳이 핑계를 찾자면 수십 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경비실에서 택배를 찾고, 마트에 들러 다 떨어진 세탁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맥주 안주를 고민하다 정육코너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아저씨가 어떤 고기를 찾고 있느냐고 묻기에 대뜸 소고기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집에서 돼지고기를 굽는 일은 냄새도 냄새지만, 시간도 오래 걸려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한우와 미국산 소고기가 보인다. 물론 부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두배 가까이 차이 나는 금액에 선뜻 어떤 걸 골라야 할지 고민하는 나를 보고 그는 치맛살을 추천해준다.

"다른 부위는 없어요?"

"등심도 있긴 한데, 아가씨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서."

딱히 소고기가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그저 적당한 안주가 필요했을 뿐. 그렇게 뭉그적거리는 나를 보더니 대뜸 이천 원을 깎아준다. 그가 추천해준 치맛살을 장바구니에 넣고 좋아하는 과일까지 골라 담았다.


고기를 구워 나만을 위한 상을 차린 다음, 맥주 한 캔을 딴다. 맥주는 언제나 첫 한 모금이 제일 맛있다.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 안에서 몸도 마음도 평온해진다. 상대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억지웃음도 지을 필요 없고, 굳이 나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따지고 보면, 어제도, 오늘도 딱히 다른 감정을 쏟아낸 날들은 아니었다. 매일 똑같은 시간과 비슷한 패턴으로 생활하는 우리들의 삶에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들이 크게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해가면서 생각만큼은 더 유연해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내 감정하나 컨트롤하지 못해서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하는 나를 마주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역시, 나는 표정을 숨길 수 없는 사람으로 무언가 언짢은 일이 있으면 얼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래도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부류의 능구렁이 같은 무서운 사람보다, 표정이 드러나는 어린아이가 좋다. 억지웃음은 내 영혼을 파괴한다.


경력이 쌓여갈수록 무거운 일이 주어진다. 연봉이 많아질수록 가슴에 얹어야 하는 돌덩이의 수도 늘어나는 법. 가끔은 이런 모든 것들이 버거울 때가 있다. 한적한 곳에서 글을 쓰며 텃밭이나 가꾸고 싶다는 간절함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커진다. 누구라도 가끔씩 힘에 부칠 때가 있는데, 지친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실망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으면. 그냥 일종의 기침 같은 거라고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다음날 출근을 앞두고도 대부분 나는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야행성도 아니고, 잠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자는 이유는, 단 하나. 이 밤이, 이 시간이 아쉬워서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다른 것을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상상의 나래를 편다. 어떤 생각을 해도 자유다. 고요한 새벽 시간, 가만히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린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혼술을 한다. 독한 술은 안 마신다. 맥주 한 캔이면 충분하다. 누군가는 내게 혼술은 쥐약이라며, 한 번 빠지면 습관처럼 매일 마시게 돼서, 술을 안 마시면 잠을 못 자게 될지도 모른다고 핀잔을 한다. 하지만, 난 쓰고 읽는 것 외엔 무언가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 가끔 괜찮은 드라마를 발견해 기분 좋게 챙겨보다가도 꼭 중반이나 후반에 가서 시시해진다.


혼술이 대세라고 드라마도 <혼술남녀>라는 게 나왔다. 각각의 캐릭터의 설정에 맞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혼술을 즐기고, 각각 혼술을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준다. 사연은 다르지만, 귀결점은 하나. '나를 위한 한 잔'이다.

드라마 소재나 컨셉이 좋아서 초반에는 혼술남녀를 잘 챙겨봤다. 갑자기 대부분의 스토리가 러브라인으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갑자기 사랑에 빠진 하석진이 혼술을 하면서도 자꾸 박하선이 떠올라 혼자만의 시간을 의미 없이 여기기 전까지만 해도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제 드라마는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쉽다. 그저 옥상달빛의 잔잔한 목소리를 담은 OST만이 나를 위로한다.


혼밥, 혼놀, 혼여, 혼춤, 혼술.

가끔은 혼자 보내는 시간 안에서 제대로 된 치유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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