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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정 Mar 24. 2023

행복하다는 말

어쩌면 달아나 버릴까 봐 꼭 숨기고 있었지


별로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인데, 햇살이 따사로워졌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좋아하는 여름에 가까워지고 있다. 무채색이던 세상이 다양한 색으로 채워진다. 인간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자연의 색이 내 눈을 즐겁게 한다.


늘 그렇듯, 푸디와의 오전 산책은 봄이 왔음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몽글몽글 맺힌 꽃망울과 여름내 푸르름을 자랑할 새싹이 앙상한 가지에서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나는 이런 변화를 보는 것이 설렌다. 주말이면 예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푸른 들판에 서 있는 나무 아래 누워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  


푸디도 이런 따스함이 좋은지, 전보다 더 많이 걷는다. 아직 걸음걸이가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일 년이면 좀 자연스러워질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직 오른쪽 뒷다리를 땅에 끌고 가는 느낌이다. 더 근육이 빠지면 안 되는데, 내가 케어를 잘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은 혼자 자책하기도 한다.


마음이 아프더라도 간식은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모질게 굴었어야 할까. 수의사는 살 빼는 일과 무조건 걷게 하는 게 급선무라고 했지만, 난 푸디의 살이 더 늘어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푸디가 맛있는 걸 먹을 때 표정이 나는 너무 좋다. 세상 무엇도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그 표정을 보고 싶어 도저히 모질게 굴지 못하겠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한 걸음이라도 더 걷게 하기 위해 산책을 하다 멈춰 선 푸디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꽃이 피었네요.

만개했나요?

아니요, 아직 조금씩 피어나고 있어요.



멀리서 선글라스를 낀 남자와 엄마뻘 되는 여자가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젊은 남자였는데, 그는 앞을 보지 못했다. 대신 그의 눈이 되어주는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원더랜드를 상상하고 있었을까, 그저 이야기를 듣고도 남자는 행복해 보였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가끔씩은 잊고 산다.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오감을 통해 봄을 누리는 특권을 가지고도 우리는 행복을 잊고 산다. 부끄럽지만, 타인의 결핍이 내겐 위로가 되고 행복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


고민거리가 없는 요즘, 그저 일상에 충실하게 사는 이 시간이 반복되면서 행복을 느낀다. 삶은 늘 불안하고 쓸쓸하다고 생각했는데, 불안한 마음이 어딘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솔로 때 느낄 수 없었던 안정감이 조금씩 더해져가고 있다. 강아지를 돌보고, 사랑하고 또 가정을 지킨다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어 보람된다. 거기에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더해지면, 이 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이다.


엄마에게 요즘 행복하다는 카톡을 보냈다.

갑작스러운 행복타령에 엄마는 당황한 듯 답톡을 보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지금 행복한데 누군가에게 내 행복을 말하면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엄마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잘 지키라고 이중적인 답변을 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라, 사는 일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이런 대답을 해준 것일까. 사라지지 않는데 왜 잘 지키라고 한 건지... 사실 행복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내 마음만 잘 부여잡으면 이 행복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푸디와 남편이 건강하게 내 곁에 있고, 아무런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같은 말로 농담하면서 하루를 보내도 웃음이 나온다. 조금은 내가 희생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사랑받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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