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는 왜 내는 데, 안 그래도 아픈 사람한테.
#ON
누워서 책을 읽다가 주르륵 눈물이 났다. 눈물의 씨가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했고, 한편으론 감사했다.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멍한 시간 안에서 그 아이가 나를 바라보던 애처로운 눈빛이 떠올랐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다 잠깐 선잠에 들면 아주 짧은 꿈을 꾸었는데 모두 다가 악몽이었다. 나는 비열했고 어리석었고 하찮을 만큼 필요 없는 잉여인간이었다. 꿈속에서 난 누군가에게도 소중하지 않은 그런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전락해 있었다. 잠이 드는 게 무서웠다. 머리맡에 전등을 켰다. 푸르스름한 빛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빛이 있으니까 조금은 낫구나 싶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통하지도 않는 누군가로 공허함을 가짜로 채우기보단 차라리 그 비어있는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만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있어야 진정으로 나답고 편안할 수 있을지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가급적이면 관리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인간관계를 제외하고는 부디 놔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나 다울 수 있는 게 뭔지를 다시 생각했다. 갑자기 길들여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길들여지지 않고 누군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생텍쥐베리가 말한 것처럼 서로를 길들이고 길들여져야 한다. 잠시 나다움은 버리고 상대를 위주로 내 퍼즐 조각은 다시 짜 맞춰진다. 연애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나는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다. 잘 잊어버린다. 어쩌면 자기방어 기질이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받는 게 싫고, 타인과 될 수 있으면 원만하게 지내길 바란다. 그래서 늘어난 건 자기합리화. 나는 무서울 만큼 나 자신에 대한 합리화가 강하다. 그러므로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뭐든 있을 수 있는 일이 된다. 누구나 겪을법한. 아니면 나중에라도 겪을 수 있는. 이런 긍정적인 태도가 지금의 나를 살게 한다. 지금 가진 슬픔에 또 다른 슬픔이 더해지더라도 괜찮다.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은 언제든지 일어난다. 일일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잔류하는 만큼 완벽한 건 없다. 하나라고 생각했다.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같지 않았다. 모든 합을 맞출 순 없었다. 갑자기 슬퍼졌다. 또 하나의 내가 내가 아니라는 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주변 환경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 하나로 빛이 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은 조만간 기억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마음속 생채기는 그대로 남겠지. 너무 많은 기대와 들뜬 마음들이 하나가 되어 구름 위로 이끌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어차피 모든 삶은 기본적인 생각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까. 바보같이 들떴던 날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올라와 두 볼이 붉어졌다.
#OFF
그래도 슬그머니 눈을 감아본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건 조금 억울하다.
내가 뭘 잘 못했다고...
그냥 두 발 쭉 뻗고 자고 싶은데 잠도 못 자는 건지 화가 난다. 불을 끄고 누워도 머릿속은 온통 복잡하다. 비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머릿속이 그렇게 복잡한데, 공허하다는 것.
지금 나는 공허함에 공허함이 더해져 침대 위를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바람만 잔뜩 들어간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라 이리저리 볼품없이 흔들리는 그런 너덜너덜한 새벽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체 화는 왜 내는 거야, 왜? 그렇지만 화를 낸다고 해서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매우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그렇게 대하더라도 떠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챈 것이겠지.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나는 이제 그런 것쯤(?) 참아야 하는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세상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다며 텅텅 빈 여자처럼 웃고 있었나 보다. 곧바로 재정비에 들어간다. 깜깜한 어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깨어있다. 참 피곤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