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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 Jul 20. 2021

어느 술자리1


1.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

      

2.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모든 아이들이 우울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울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불행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 년은 정말 쌍년이야.” K는 엄마를 욕한다. 욕 같지 않은 욕. 부러 내뱉고 끝내 자신이 상처 받고 마는 그런 욕. 슬픔을 분노로 포장하기 위한 K의 어색한 노력은 끝내 실패한다. 

“그 년은 정말 쌍년이라니까.” 그렇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K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그게 나를 슬프게 만든다. 이를 너무 세게 물어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간신히 눌러 담아 침묵을 유지한다. ‘아무리 그래도’라는 말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무얼 아무리 어떻게 그래도라는 건지. 말을 하기 전에 말의 모순이 나를 제지한다. 

“그래도 사이좋지 않았어? 너가 엄마 수업도 알아봐 주고 그랬잖아.” 화제를 전환하고 싶다.

“그야. 그 년이 듣고 싶다고 하니까. 알아봐 주는 거고. 그 년이 나를 얼마나 때렸는데. 지금도 왜 그렇게 나를 때렸는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그 년은 그냥 쌍년이야.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아무리 그래도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끝내 그 말이 기어 나온다. 죽어버려도 좋을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내 내뱉은 말을 후회한다. 후회를 얼버무리기 위해 비어 있는 K의 잔에 싸구려 위스키를 따른다. 제임스는 K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다. 한 병에 삼 만원. 소주보다 비싸지만 조금만 마셔도 쉽게 취하니까 그렇게 비싼 건 아니라고 말하며 K는 종종 위스키를 사 왔다.

우리들은 우울하다. 내 방의 조명은 따뜻하고 인형들도 많지만 우리들의 대화는 너무 처량하다. 

“우리 엄마도 쌍년이야.” 잠자코 듣고 있던 Y도 K의 분노에 동참한다. 

“엄마는 아직도 나한테 시집만 가라고 해. 팔아넘기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결혼하기 싫다고. 내 성격에 결혼하면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말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얼른 시집이나 가버리라고.”     


3.

어렸을 때는 우리 집이 불행한 줄 알았는데 이제 와보면 미묘한 불행이었다. 조금 일그러졌을 뿐이다. 엄마는 나를 무척 사랑했고 아빠는 나름대로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어린 시절 생각했던 불행은 아주 평범한 불행이었다. IMF를 겪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라면 매일 듣고 자랄 수밖에 없는 뻔한 레퍼토리의 싸움이 있었을 뿐 우리 엄마도 아빠도 좋은 사람이었고 결코 나쁜 일도 한 적이 없다. 가난해서 싸웠고 가난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고 아빠도 나에 대한 책임을 방기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책임감이라는 말이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은 어른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아빠는 곧잘 책임감 때문에 너희를 키운다고 말했다. 세상에 수많은 부모들이 아무런 책임감 없이 아이들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나는 아빠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4.

 어제 연예인 S가 죽었다. 그만 살기로 결심을 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고 그 실천은 실패하지 않았다. S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사의 대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 문구가 달렸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5.

 하지만 자살은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다. 자살은 꾸준함이고 성실함이다. 성공이 우연에 달려있을 뿐이다. K는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고 그것을 두려워한다. 우울함이 일상적인 수준을 벗어났다고 느꼈을 때 K는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뭐해?” K는 우울할 때만 나의 ‘지금’을 묻는다. 뭐하냐는 K의 물음은 우울의 신호이다. K는 바쁜 나를 방해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오늘 밤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직감에 나의 옷깃을 간신히 잡아 붙들 듯 에둘러 묻는다. 

“그래도 우울할 때 술을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더라구…. 너는 오늘 바쁘지?”

“나도 마음은 같이 술 마시고 싶은데….”

하지만 나는 결국 노트북을 접고 K와 술을 마시러 간다. 나는 K를 모르는 척할 수 없다.     


6.

비가 와서 우리는 전집에 갔는데 막걸리를 시키지는 않았다. 소주를 한 병 시켰는데 할 일이 생각나서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K는 혼자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바깥은 비가 내렸다.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공기였다. Y 부를까? 나는 넌지시 묻는다. 한 시간 뒤 Y가 왔고 K의 남자친구도 왔다. 또 다른 친구 J도 왔다.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네 명 중에서 세 명의 사람이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다.      


7.

“오늘 밤에 혼자 못 있을 것 같아서 응급실 갈까 고민 중이야.” K가 말한다.

“혼자 못 있을 것 같으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근데 가면 뭐 약 같은 거 주는 거야?” 내가 같이 있어줄 수는 없으니 나는 병원이 그 역할을 해주기 바라며 입원을 권장한다. 

“응. 그냥 침대에 누워 있는 거야. 약도 받고” K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약을 받아먹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는 K의 새벽을 상상한다. 

“오늘 밤에 K랑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나는 K의 남자친구에게 물었다.

K의 남자친구는 나에게 대답하는 대신 K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오늘은 집에 가서 잘 거야.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나도 힘들어서 내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해. 너 막 자면서 뒤척이고 난리 치고 할 텐데 내가 그 옆에서 어떻게 자.” 어떻게 저렇게 매정하게 말할 수 있지? 속으로 생각했지만, K가 더 비참해지게 만들 수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버리고 K의 남자친구와 둘이 남아 어색해진 나는 대충 운을 띄운다. 

“힘드시겠어요.”

“이제 괜찮아요. 저도 이제는 포기했어요. 제가 죽지 말란다고 해서 안 죽을 애도 아니고. 그렇게 자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도 자해하잖아요. 어쩌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K의 남자친구는 K의 죽음을 포기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다는 투로 말한다. 벌써 만난 지 이년이 다 돼 가고, 이 년 동안 수없이 많은 밤을 K는 우울했다. 아니 대부분의 밤이 우울했다.

“그럴 바엔 헤어지는 게 낫지 않나요?” 나는 서운함과 약간의 화를 감추며 애써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헤어질 생각은 없어요. K를 좋아하지만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예요.” 


참 이상했는데 알 것도 같았다. 저 사람도 힘들었겠지. 평범한 사람이었을 텐데 지금은 우울의 한가운데에 있다. 사랑이란 뭘까? 그래도 곁을 떠나지 않고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저 사람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결국 저렇게 하나둘 포기하게 되는 건가? 나는? 처음에는 K에게 갑자기 전화가 오면 긴장부터 했다. 신호음이 끊기기 전에 수신 버튼을 눌렀고 행여라도 제때 못 받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했다. 연락이 계속 안 되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기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끔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게 되었다. 변명하자면 정말로 인생에서 너무 바쁜 시기를 맞이했고 K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의 약속도 잡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K의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기 시작했고 그게 너무 미안했다. K의 남자친구도 마찬가지 이리라. 벌써 이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밤으로부터 K의 죽음을 지켜냈을까. 단지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버텨내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사랑이 어느 순간 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거 같아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의지나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 뭐 그런 의지가 하나도 없어요 K는. 아무 의지가 없는 데 살라고 해서 뭐하겠어요.” K의 남자친구가 비어 있는 K의 자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공감이다. K는 하고 싶은 게 없다. 너는 글이 있어서 좋겠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 K는 가끔 나를 부러워했다.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에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살아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사실은 살고 싶지 않은 운명이 있는 것이라면. 사실은 정말 살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면. 그 아이에게 조금만 더 버텨내라는 말은 너무 큰 폭력이 아닐까? 그렇다고 죽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남겨진 자의 슬픔 아닌가? 혹시 내가 두려워하는 건 남겨진 나의 슬픔이지 살아서 견뎌낼 K의 슬픔은 아니지 않을까? K의 우울 앞에서 언제나 그런 생각들이 맴돌았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술을 마시고 또 하나의 밤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8.

 K는 과연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K를 지켜낼 수 있을 만큼 강했으면 좋겠다. K는 정말 언젠가 죽어버릴까? 그렇지만 그전에 내가. 그전에 Y가. 누가 먼저 죽어버려도 사실 이상하지는 않다. 우리는 너무 나약해서 자주 술을 마신다. 그렇지만 사실은 모두 죽고 싶지 않다. 나는 K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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