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에서 생각하는 난민과 통일
"퇴사후 미얀마에서 농업 부문의 ODA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500명의 예맨 주민이 제주도로 이동하면서 단체로 이동함에 따라 국내의 다문화 사회에 대한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다. “난민 반대”에 대한 국민청원이 29만 명이라는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새로운 당면 과제에 불을 지폈다. 미얀마에서는 난민이라는 존재의 사회적 현상을 가장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양곤에서 처음 난민을 만났다. 양곤 길목에서 무거운 배낭을 이고 걸어가다가 중 누군가 나에게 길을 물었다. 누추한 그의 모습에 불안했지만 길을 알려줬다. 바로 앞 기차역이었는데 아마도 접근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심을 드러냈다. 자기가 난민이니 좀 도와달라고 말을 이었다. 그는 정부와의 갈등으로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된 로힝야족이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도망치듯 골목을 뛰쳐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ODA사업한다는 사람이 돈 한 푼 못 쥐어준 빈곤 혐오가 가득한 심보였다.
국내에도 반이민정서와 극단주위로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조차도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ODA사업을 하다보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한민국은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바뀐 유일한 나라라고 자부심 넘치게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ODA사업은 국제사회에 진 부채를 갚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한국만의 역사가 아닌 것을 인정해야한다. 국제관계란 유기물과 같아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3,000명이 넘는 미얀마 주민들이 우리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여기 와서 알았다. 우리 농산물은 우리 농민이 생각하던 선입견이 깨진 순간이었다. 우리 사회의 두터운 민족주의가 여전히 외국인 노동자를 그림자처럼 생각하고 있다.
미얀마의 농촌 출장길에 느끼는 감정이 있다. 바로 북한의 존재. 미디어를 통해 북한이 가난하다고 흔히 듣는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 살면서 가난의 형태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북한 주민이 굶주리고 산다고 하지만 그 굶주림과 누추함을 오롯이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017년 기준으로 북한의 1인당 GDP는 146만원으로 미얀마의 153만원으로 그 수준이 비슷하다. 우리에게는 1년에 150만원 남짓으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미얀마의 논과들에서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삶을 그려본다.
1991년 우리나라는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졸업했다. 내가 태어난 해였다. 가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먹고 살기 힘든 더러운 세상”이라고 푸념했지만 우리나라가 가난한 나라라고 느낀 적은 거의 없다. 내가 태어난 시대는 ‘원조 받는 개념’을 모르고 살아 왔다. 난민과 통일. 가난과 빈곤. 여태껏 생각해보지 않았던 생각을 해봐야하는 때가 찾아왔다.
지금과 같이 가난과 빈곤을 모르고서 우리의 오랜 염원인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혐오로서 국제사회에서 우리는 리더쉽을 갖출 수 있을까?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난민’과 ‘통일’을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