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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군 May 25. 2019

새벽을 걷다.

지하철이 구로역에서 멈췄다. 인천에서 1년여만에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인천터미널 역에서 인천2호선을 타고 올라오다 7호선으로 갈아타고 장승배기역까지 갈 생각이었다. 부평구청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탄건 좋았다. 그런데 온수역에서 분위기가 이상하다. 종점에서만 들리는 음악이 나오더니 역사 직원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들어오신다. "모두 나가세요. 여기가 종점입니다~”


자정이 약간 지난 시간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토요일, 아니 이제 일요일 아닌가. '아니 주말인데 벌써 막차라고?'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네' 베테랑의 유아인으로 빙의한다. 왜 주말인데 주중보다 일찍 지하철이 끊기는거야. 여기서 집에 어떻게 간담. 버스가 있을까. 택시를 타면 2만원은 훌쩍 넘을텐데.. 등등의 생각을 하다 문득 온수역이 1호선 지하철도 지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1호선으로 이어지는 플랫폼에 설치된 운행판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 지하철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마저 '구로역'이 종점인 막차였다. 집까지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온수보다는 구로가 낫다 라는 생각에 부리나케 1호선 플랫폼으로 달렸다. 아슬아슬하게 온수역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열차는 나의 가빠진 호흡따윈 상관없이 일정한 숨을 뱉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구로역에 도착해서 지도를 켰다. 일단 2번출구 방향으로 나가서 택시를 탈 생각이었다. 2번출구로 나가는 길은 고가로 연결이 돼있었다. 고가의 입구에 들어서자 몇몇 아저씨들이 다리위에서 뭐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안양~ 수원~ 인천 방향~~' 대부분 이런. 택시기사였다. 막차라는것을 알고 장거리로 가는 사람들을 태울 생각인가 보다. 그분들께 '저 상도동은 안가나요?' 라고 했다간 날카로운 눈빛 공격만 받을게 뻔했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밖에 있는 사람은 90%가 택시기사, 나머지는 나처럼 막차에서 빠져나온 이들. 그리고 모든 택시기사는 안에서와 같이 '안양~' '수원~' '인천~' '일산~' 만 외치고 있었다. 여기서 택시를 잡긴 틀렸다. 오지도 않을 택시를 기다리다 시간을 버리니, 일단 걸어가면서 택시를 잡겠다는 결심을 하고, 걷기 시작했다. 일단 신도림역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하지만 택시는 잡히지않았다. 그 많던 택시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30분여를 걷다보니 어느새 신도림역 앞까지 왔다. 이젠 결심을 해야 한다. 다음지도를 펼치고 집까지 거리를 확인했다. 약 5.3km  도보로 1시간 15분정도 예상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잠시 고민했다. 걸어가자. 만약 걸어가다 택시가 잡히면 타면되고, 아니라도 빨리 걸으면 1시간정도 걸린다고 나오니, 마냥 여기서 택시를 기다리는 것보다 그 방법이 나을 거란 생각이었다. 


4차선인지 6차선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 커다란 도로를 지나 2차선 도로로 들어섰다.이젠 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가끔 멀리 아지랑이 피듯 지나갈 뿐이다.그러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아까는 그렇게 이게 뭔 고생인가,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올라왔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이 시간에 평화롭게 걸을 수 있다는게 큰 행복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따발총처럼 들리던 자동차소리는 이젠 심심할때마다 한대씩 지나가며 귓볼을 친다. 명상음악의 중간중간에 들리는 종소리처럼. 


인도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흙은 아니지만 폭신폭신한 바닥재가 1만원짜리 컨버스화를 신고 걷느라, 게다가 양말도 신지 않아서, 옥의티인 내 발에게 천사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이폰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이밤에 어울리는 재즈와 피아노 선율이 어둠속에서 나만의 리듬을 들려준다. 걸으면서 명상을 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머리가 맑아지면서 많은 생각이 밤하늘의 별처럼 떠올랐다. 물론 아쉽게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봐도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상의 흐름속에서 한번도 제대로 볼 생각을 못했던 길가의 풍경, 이 밤 산책을 즐기는 몇몇 사람들을 지나치며 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밤산책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오늘은 주말이니까 지하철은 당연히 더 늦게까지 운행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지하철을 운행하기 위해서 운전사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직원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말이다. 아까 온수역에서 우리를 쫒아내듯 - 물론 이건 순전히 그때 나의 삐뚤어진 기분탓일 것이다- 오늘 열차 운행이 끝났다고 말하던 아저씨도 빨리 집에가서 쉬고, 아이들과 치킨 한마리 먹고, 아내와 맥주 한잔하는게 낙일텐데. 왜 당연하게 그들은 밤새 일해도 괜찮은거 아닌가. 그게 대중교통의 역할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그들이 로보트도 아니고 새벽까지 일하고 들어가면 피곤한것은 당연할텐데. 설, 추석등 명절도 마찬가지다. 우린 언제나 명절에는 새벽 2시까지 지하철이 연장운행하는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들도 고향이 있고, 가족이 있는데 말이다. 


공공서비스라는 말을 우린 너무나 이기적으로 사용하는게 아닐까. 공공서비스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분들도 쾌적하고 안전한 근무환경이 보장이 돼야 더욱 능률이 높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 짧은 마음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어느새 신대방 사거리역을 지난다. 목이 말라 편의점에서 1+1을 하고 있는 게토레이를 샀다. 뚜껑을 열고 새벽 공기보다 찬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조금더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새벽의 풍경을 눈 깊숙히 담으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새벽이 

함께 걷는다.

천천히.

내 발걸음에 

맞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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