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과 침묵

<밤쉘>(Bombshell)

by 수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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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견해나 신념 혹은 경제적 위치의 차이에 상관없이, 남성이 권력을 쥔 곳에서 여성이 겪게 되는 폭력과 이 폭력으로부터 생존하는 방식은 거의 동일하다. 갑인 남자는 을인 여자의 치맛자락을 들추고 싶다. 그래서 여자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준다. 요구에 응하면 창창한 미래를 줄 것이고, 응하지 않으면 밥줄이 끊기게 될 것이라는. 이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거래 앞에서 여자는 응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다른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된다. 침묵할 것이냐, 연대할 것이냐.


<밤쉘>은 폭스 뉴스의 앵커들이 기나긴 시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연대하는 한 순간을 그렸다. 2016년 폭스 뉴스 CEO의 성추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똑똑한 금발 미녀들이 남성 권력에 의해 어떻게 희롱당하고 조종당하는지를 보여준다. 내용은 진부하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여자의 몸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희롱하며 "농담"을 던진다. 여기에 발끈하면 "페미니스트" 내지 "남자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여자가 된다. 이런 문화(?)의 정점에 폭스 뉴스 설립자인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가 있다.


로저는 충성심(loyalty)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이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성별에 따라 다르다. 여자인 경우 로저는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원한다. 이를 거부했던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은 결국 진행하던 쇼에서 하차하고 비인기 시간 대의 쇼로 밀려난다. 끝내 부당한 해고를 당한 그레천은 그동안 모아 두었던 증거를 가지고 로저 에일스를 성희롱 혐의로 고소한다. 마침내 수면 위로 등장한 로저의 여자 부하 충성심 확인 절차. 그레천의 분노와 용기는 각자의 침묵 속에서 고립되어 있던 여자들을 비로소 소환한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앵커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도 함께 목소리를 보태면서 연대는 시작되고 로저는 흔들린다.


이 과정에서 여자들은 각자 분열을 겪는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조롱 섞인 문장을 증명이나 하듯 폭스 뉴스의 여자들은 로저가 아니라 그레천을 향해 날을 세운다. 로저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고 폭스 뉴스의 어떤 남자들도 자신에게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소리 높여 말한다. 메긴 역시 로저가 여성인 자신에게 얼마나 기회를 주었는지, 그가 어떻게 폭스 뉴스를 성공시켰는지 등을 돌이켜 보며 로저를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다. 남성 권력에 의한 직장 내 성희롱은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를, 그것도 자기 월급 주는 사람을 고발하는 일에는 각오가 필요하다. 지금껏 유지하던 생활에 금이 갈 것이고 밥줄도 끊길 것이며 피해자로 낙인까지 찍힌다. 끔찍했던 과거는 증명을 위해 반복적으로 상기시켜야 할 것이고 2차 가해는 말할 것도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인정해야만 하고 심지어 커리어의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그러니 여자는 정신 분열적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부정하고 두둔하고 침묵하거나 숨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저의 철옹성은 그렇게 지켜져 왔고 여자들은 생존을 위해 발악해 왔다. 그리하여 금발의 파란 눈인 또 다른 젊은 여직원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이 로저의 방에서 같은 일을 당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라.


그래서 케일라는 로저의 성추문과 관련해 자신을 찾아온 메긴에게 비난조로 묻는다. 어째서 당신이 당했을 때 신고하거나 막으려고 하지 않았냐고. 그때 당신이 어떤 행동을 했으면 내가 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이 힐난에 메긴은 할 말이 있다. 어쩔 수 없었음을 어필하지만 그때 자신이 침묵하고 방치했기에 이어진 피해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변명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메긴을 욕할 수 없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로저의 비서도 또한 손가락질할 수 없다. 로저의 사무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뻔히 알면서도 태연하게 젊은 여자 직원을 그 방으로 웃는 낯으로 인도했던 여자임에도. 연대하지 못한 채 고립된 여자들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각자도생인 곳에선 오로지 내가 살아남는 방식으로만 움직이기 쉽다. 당장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걱정하기엔 여유와 기회가 없다. 폭스 뉴스의 오너인 머독 일가에게 부여받은 권력으로 로저는 이렇듯 취약한 여자들을 마음대로 부린다. 8층의 오너들을 등에 업고 2층의 로저가 지하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불러 올리는 것이다.


로저는 여자들에 둘러싸여 산다. 여자 변호사와 여자 비서와 와이프의 보호 속에서 안온하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산 남자다. 그가 하는 것이라곤 고작, "텔레비전은 시각 매체"니까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 앵커들의 다리가 반드시 카메라에 잡히게 하라고 지시하는 것뿐이다. 할 줄 아는 게 없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일할 때에도, 문제가 생겼을 때도, 그의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은 언제나 여자다. 그의 존재감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어린 직원을 희롱하거나 여성 앵커에게 외모 비하를 하며 소리칠 때에만 드러난다.


로저의 권력은 폭스 뉴스 사옥의 8층으로부터 비롯한다. 굳건하던 수직적 구조는 지하에 고립되어 있던 여자들이 희미하게 연대하기 시작하면서 동요한다. 그러나 결말은 비극적이다. 사실상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작은 지하였으나 결정은 8층에서 이뤄졌다. 로저의 사임은 피해자 여성들 때문이 아니라 머독 가의 선고로 정해졌다. 평소 폭스 뉴스가 마치 자기 것인 양 설쳐 대는 로저가 눈에 거슬렸던 루퍼트 머독(맬컴 맥다월)의 두 아들이 성추문을 계기로 그를 밀어내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로저가 나간 자리에는 루퍼트 머독이 앉는다. 도널드 트럼프를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는 영감님이 친히 로저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그러니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여성 앵커는 여전히 몸매가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힐을 신은 채 방송을 계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관하긴 이르다.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입은 케일라가 사원증을 버리고 회사를 나가기 때문이다. 모두가 루퍼트의 연설에 고개를 들고 서 있을 때, 케일라 홀로 그 공간을 등진다. 온 가족이 휴가 때조차 폭스 뉴스만 보는 집안에서 자란 케일라가, 그래서 폭스 뉴스에 나오는 것이 꿈인 케일라가 말이다. 그레천이 일으킨 동요가 차마 시스템을 움직이진 못했으나, 그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던 한 사람의 마음은 움직였다. 아무리 높은 건물이더라도 아래를 떠받치고 있던 것들이 흔들리면 무너지기 마련이라. 움직임은 지하에서 이미 시작됐다. 체념하기에 아직은 좀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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