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비저블 라이프>(A Vida Invisível)
영화를 보고 나서 강화길의 「음복」이 떠올랐다. 이 단편은 이제 막 결혼한 며느리가 시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제사를 지내면서 벌어진 해프닝을 그녀의 일인칭 시점에서 그린다. 여기서 며느리 곧 화자는 시댁에 오자마자 불편한 기류를 파악한다. 시고모와 시어머니 그리고 시할머니 사이에 떠도는 거북한 분위기를 그녀는 일찌감치 감지한다. 반면에 그녀의 남편은 시종일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시할머니와 시고모가 미워 마지않는 시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남편은 끝까지 시어머니의 비호 속에서 집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해맑은 인물로 남는다.
이때 남편의 '무지'는 권력에 다름없다. 모르기 때문에 제사상에 오른 해괴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시고모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치는 권력 아래에 있는 이들의 것이다. 그의 눈에는 어머니와 고모, 할머니 사이의 갈등과 관계, 이로 인한 그들 각각의 삶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한눈에 안 화자와 달리. 여기서 모른다는 것은 분명 특권이다.
<인비저블 라이프>는 가부장제가 무지라는 특권을 이용해 어떻게 두 여자의 인생을 지워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음복」에서는 남편이 모른 척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다소 불분명하게 나온다. 하지만 이 영화 속 남자들은 자신이 어떤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는 잔인하게 끝난다. 1950년대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슬프다.
사이가 각별한 자매인 귀다(줄리아 스토클러)와 에우리디스(카롤 두아르테)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다. 언니인 귀다는 천방지축인 반면 동생인 에우리디스는 피아니스트가 꿈인 순종적인 아가씨다. 어느 날 귀다가 아버지 몰래 나간 파티에서 잘생긴 해군을 만나 그날 곧장 그리스로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면서 둘은 헤어진다. 에우리디스는 초록색 드레스를 걸치고 파티에 갈 생각에 들뜬 언니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이후 귀다는 임신한 몸으로 리우 데 자네이루로 돌아오지만 이미 동생은 집을 떠난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에우리디스가 비엔나에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집에서 매몰차게 내쫓는다. 귀다는 에우리디스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시집갔다는 사실을 모른 채 동생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쓴다. 에우리디스 역시 언니가 브라질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귀다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그녀의 행방을 찾아다닌다.
자매의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흔하다. 귀다처럼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갔다가 아버지에게 쫓겨나 거리로 나앉고 마는 여자의 삶은 기구하다. 남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약점을 담보로 몸을 요구하고 여자는 생계를 위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나 남편의 보호가 없는 여자에게는 몸을 상품으로 내놓는 것 외에 별다른 선택권이 없다. 운 좋게 일자리를 얻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을 견뎌야만 한다.
한편 에우리디스처럼 아버지가 정한 배우자와 결혼해 산다고 해도 사정은 그다지 편치 않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첫날부터 잠자리를 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유사 강간에 다름없지만 눈 딱 감고 참아야만 한다. 아버지의 자리는 남편으로 대체되고 결혼 전 품고 있던 꿈은 영영 멀어진다. 원하지 않아도 임신은 반드시 해야 하고 아내이기 때문에 무조건 가정을 우선시해야 하며 그래서 자신이 무언가 되고자 하면 그저 욕심으로 치부되어 비난받는다.
에우리디스는 첫째를 다 키우고 나서 남들 몰래 유명 음대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거기에서 1등이라는 성적으로 입학 허가를 받지만 집안의 누구도 축하하지 않는다. 남편은 집안일은 누가 하냐며 화내기에 급급했다. 헤어지기 전 귀다만이 에우리디스의 꿈을 응원해주었고 그녀가 피아니스트가 될 것임을 믿었다. '평범'하게 주부로서 살아간 에우리디스의 삶은 귀다만큼 기구하진 않지만 비참하기는 매한가지다. 친정 식구들을 돌봐주고 경제적인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남편 아래에서 그녀는 '에우리디스'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엄마일 뿐이다. 어디에도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이가 없다.
두 자매의 삶은 아버지와 남편의 의도적인 '모른 척'으로 인해 비극으로 치닫는다. 자신의 체면을 위해 귀다를 없는 자식으로 취급한 아버지로 인해 두 자매는 가까이 있었음에도 끝내 만나지 못한다. 이것은 에우리디스의 남편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귀다가 에우리디스에게 보낸 편지를 죽을 때까지 모조리 숨겼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에우리디스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 그것들을 발견한다.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을 때 귀다는 이미 죽은 뒤였다. 이 뿐만 아니라 에우리디스의 남편은 피아니스트라는 그녀의 꿈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에우리디스는 끝내 음대에 진학하지 못하고 그의 아내로서 살아간다. 귀다와 에우리디스는 그렇게 그들의 삶에서 투명하게 지워졌다. 이들의 일관된 '모른 척'은 두 여자의 삶을 아주 간단하게 생략시켰다. 그리고 이 무지의 권력은 트라우마로 정신줄을 놓은 에우리디스를 진찰한 산부인과 의사가 그녀의 남편에게 건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극대화된다.
"엄마 역할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인간은 어리석게도 아는 만큼만 본다. 우리는 모르는 것은 보지 못한다. 그런데 영악하게도 우리는 때때로 이것을 자기 합리화를 위해 이용한다. 일부러 모른 척 함으로써 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지는 폭력이 된다. 이것을 늦게라도 반성하고 사과했을 때에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라고 조금이나마 이해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을 때 누군가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조각나버린다. 짝을 잃은 파편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뒹구는 것만큼 아픈 장면이 있을까. <인비저블 라이프>는 그런 아픈 장면이 우리의 사각지대 곳곳에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킨다. 보이는 것[visible]은 이미 보이지 않는 것[invisible]을 내포하니, visible은 언제나 앞에 'in'을 생략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래서 무지는 폭력이라는 것을 <인비저블 라이프>는 아름답고 슬픈 방식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