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봉합

<노매드랜드>(Nomadland)

by 수자타


"My mom says that you're homeless, is that true?"
"No. I'm not homeless. I'm just houseless. Not the same thing, right?"


'vanguard'라는 이름을 붙인 밴에서 생활하는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은 자신에게 홈리스냐고 묻는 아이에게 위와 같이 답한다. 그녀에게는 'house'가 없을 뿐, 'home'이 없는 것이 아니다. 펀은 왜 집(house)이 없을까? 자신이 홈리스가 아니라는 그녀의 대답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말로는 똑같이 '집'으로 변역 되는 'house'와 'home'은 어떻게 다를까?


2011년 네바다주 엠파이어 시에 있던 US 석고 공장이 문을 닫았다. 공장의 폐업과 동시에 그 주변의 우편번호도 사라졌다. 그때까지 석고 공장에서 일하며 평생을 살았던 펀의 집도 함께 지도 위에서 없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거되었다. 첫 장면에서 펀은 컨테이너에 짐을 맡겨두고 꼭 필요한 것만 챙겨서 밴을 타고 평생을 살았던 그 동네를 떠난다. 개조한 밴을 타고 펀은 여기저기를 떠돌며 아마존이나 국립공원, 감자 공장 등의 임시직을 전전한다. 그렇게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펀은 집을 지고 다니는 노매드(nomad)가 되었다.


2008년 경제 공황으로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이 거리로 나앉았다. 강제로 거리에 내몰린 사람들은 스스로를 노매드라 부르며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유해 간다. 시작은 반강제였으나 끝은 다른 출구로 이어졌다. 지구에 연결되는 시간이 늘고 돈은 필요한 만큼만 임시적으로 번다. 낯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샌드위치를 내밀고 대가나 조건 없이 도움을 주고받는다. 물건들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의 손으로 순환하고 짐은 점점 줄어든다. 그렇게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된 미국인들이 노년의 삶을 이어간다. 펀은 길 위에서 이 사람들을 만난다. 황량한 들판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삶의 한 부분들을 공유하고 죽은 친구를 기억하며 애도한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만나 길 위에서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영화는 펀의 여정과 노매드들의 삶을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따라갈 뿐이다. 길 위의 사람들이 제각기 지고 있는 짐과 삶은 무겁고 어둡다. 각자 짊어진 상처들은 쉬이 아물지 않고 기약 없는 방랑은 때때로 막막하다. 갑자기 밴이 멈춰 서기도 하고 지친 몸이 예고 없이 아프기도 한다. 자유로움은 안락과 안정을 대가로 얻어진다. 그렇게 얻은 자유에도 불구하고 노매드들은 펀처럼 사실상 떠나온 '그 집'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이기도 하다.


집이란 돌아갈 곳이다. 돌아갈 곳으로써의 집은 마치 뿌리와 같아서 한 사람을 지탱하는 지지대가 된다. 그리고 이 지지대는 기억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집에 돌아가면 느끼는 안정감과 안도감은 공유할 기억으로부터 비롯한다. 자신이 기억하고 자신을 기억해 주며 그것을 공유할 사람이 있는 공간. 기억하고 기억된다는 감각이 공간과 얽힐 때 돌아갈 곳으로써의 집은 단지 'house'가 아니라 'home'이 된다. 그래서 펀은 홈리스가 아니지만 한편으론 홈리스이기도 하다.


"My dad used to say, what's remembered lives.
I maybe spent too much of my life just remembering."


펀은 남편이 평생을 보낸 그 동네를 남편이 병으로 죽고 나서도 떠나지 못했다. 자신마저 그곳을 떠나면 남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남편은 고아였고 둘 사이에는 아이도 없었기에 오로지 펀만이 남편의 부재를 감지한다. "기억되는 것은 살아있는 것"(what's remembered lives)이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펀은 남편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 집에서 계속 살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집(home)을 지키기 위해 펀은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래서 펀은 홈리스가 아니면서 동시에 홈리스이기도 하다. 기억의 파편을 가득 실은 밴이 곧 자신의 돌아갈 곳이기에 홈리스가 아니다. 또한 펀의 있음 자체가 남편의 존재를 담은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펀은 홀로 남아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못한 채 남편을 기억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썼다. 그녀의 곁에는 자신의 기억을 공유할 사람도, 자신을 기억해 줄 누군가도 없다. 기다리는 사람도, 돌아갈 곳도 없는 펀은 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홈리스다. 남은 것이라곤 불안정한 노후뿐인 늙은 홈리스.


삶은 어쩔 수 없이 기억과 결부된다. '나'의 존재는 '너'의 기억으로 증언되고 '너' 역시 '나'의 기억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잊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멸한다. 노매드들의 방랑이 고독하고 씁쓸한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그들은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자신들을 기억해 줄 누군가를 지니고 있지 않다. 존재의 흔적을 간직할 무언가가 없는 것이다. 펀이 길 위에서 만난 사람 중 한 명인 스웽키(샬린 스웽키)는 잊히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혹시 자신이 죽거든 펀을 비롯한 노매드들이 함께 모였을 때 모닥불 앞에서 자신을 추억해 주기를 바란다.


남은 것은 늙음과 죽음뿐인 사람들. 영화는 이 불안정한 시간을 버티고 이어가는 노매드들을 그저 받아들인다. 냉소하지도, 체념하지도 않는다. 스스로를 노매드로 호명하고 길 위에서 보내게 될 남은 시간을 긍정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다를 보고 석양을 느끼고 거대한 자연의 일부가 될 시간 속으로 그들을 끌어안는다. 마치 깨진 펀의 접시처럼.


단풍잎이 그려진 접시는 펀의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유품이다. 이 접시를 보며 펀은 아버지를 추억한다. 이 접시가 길에서 만난 또 다른 노매드인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라탄)의 실수로 바닥에 떨어져 깨진다. 펀은 깨진 조각 하나하나를 모아 다시 접착제로 이어 붙인다. 깨진 자국이 여실히 남았지만 접시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깨졌지만 괜찮다. 다시 붙이면 되니까. 영화는 펀의 남은 시간도 이 접시처럼 봉합되어 괜찮아질 거라는 희미한 위안을 남긴다. 희망이라고까지 얘기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절망도 아닌, 그런 위안. 펀이 언니인 돌리에게서 자신을 기억하는 흔적을 찾았듯이. 완전히 혼자가 됐다고 생각해도 실상 그렇지 않다. 미처 보지 못한 곳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만난다.


마지막에 펀은 다시 우편번호가 사라진 '그 집'으로 돌아간다. 컨테이너에 보관했던 남은 짐을 모두 처분하고 차분하게 그 집의 뒷마당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펀은 다시 길 위로 돌아간다. 이제 펀에게는 그 길이 곧 집이다.


"There's no final good-bye. [...] I'll see you down on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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