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과 윤리

<소리도 없이>

by 수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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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주부전의 토끼와 거북이 중 누가 더 영악할까? 누가 더 억울할까? 애초에 용왕은 왜 토끼의 간을 먹어야만 했을까? 용왕 없이 거북이가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용왕도 잘못된 처방전의 피해자라면? 용왕과 거북이, 토끼 각자가 생존 앞에서 택한 선택들에 어떤 잣대를 들이밀 수 있을까? 영화 <소리도 없이>는 이런 질문들을 계속 묻게 만든다.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대외적으로는 계란 장수지만 주로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시체 수습을 하며 먹고 산다. 살인 현장을 청소하고 시신을 뒤처리 하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나름 전문적으로 해오던 두 사람에게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단골이던 조폭 용석(임강성)이 11살 초희(문승아)를 맡아달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반쯤 협박에 가까운 요구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초희를 떠맡게 되었으나, 상황은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초희를 봐 달라고 의뢰를 했던 용석이 죽게 되면서 창복과 태인이 졸지에 초희의 유괴범이 되고 만다. 창복의 설득 끝에 얼떨결에 초희를 자신의 하우스까지 데려와 버린 태인. 태인의 일상에 토끼 가면을 쓴 초희가 들어오면서 그의 삶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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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 태인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듣기는 하는데 입을 열진 않는다. 태인 외의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사정에 대해 쉼 없이 떠들어댄다. 창복도, 용석도, 유괴 및 납치 전문 업자도, 아동 인신매매 업자도, 심지어 초희의 부모도 자기 사정을 말하기에 급급할 뿐 다른 누군가의 상황을 헤아리지 않는다. 유일하게 태인만이 말없이 상황을 살피고 필요한 일들을 처리한다. 싫은 내색을 보이면서도 결국은 창복의 말대로 해 주는 불친절한데 상냥한 인물이다. 그리고 초희로 인해 태인은 창복 없이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


흔히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으로 언어를 든다. 언어 곧 말은 인간의 속성이고 소리는 동물의 속성으로 분류된다. 이런 측면에서 태인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 사회에 대한 일종의 거부로 읽힌다. 침묵을 고수함으로써 태인은 영화 속에 만연한 악의 평범성에서 살짝 비껴나간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비즈니스를 하듯 범죄를 저지른다. 시체 처리 업자, 아동 유괴 업자, 협박 및 살인 업자, 아동 인신매매 업자 등 각각의 전문 분야가 분화되어 있고 물건을 거래하듯이 목숨을 흥정하고 돈으로 교환한다. 아무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초희의 부모조차 납치된 아이가 3대 독자인 아들이 아니라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유괴범이 요구한 돈을 깎으려 든다. 이 파렴치한들은 평범한 일반인과 쉬이 구별되지 않는다. 회사를 다니듯 유괴를 하고 업무를 처리하듯 사람을 거래한다. 친절하고 사무적이다. 게다가 창복은 아주 신실하게 하느님을 따른다. 이 괴물들 속에서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태인의 태도는 소리 없는 저항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뭐든 하는 영리한 소녀 초희가 나타났을 때, 태인은 소리 없이 그 침묵을 침묵으로 깨부순다.


불안과 초조가 끝내 창복을 하느님 곁으로 인도한 뒤, 태인은 혼자가 된다. 명령을 내려줄 누군가가 사라진 태인은 반강제적으로 홀로 어떤 결단을 내린다. 죽은 용석의 검은 수트를 입고서 그가 스스로 하는 선택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윤리적이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가 도래했을 때 태인은 과감하게 그로부터 도망치고 미련 없이 수트를 벗어 버린다. 그럼에도 이 찰나의 결단이 그를 구원하게 되리라는 희망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운으로 남는다. 초희는 어른이 될 것이고 태인은 앞으로도 여전히 침묵 속에서 살아갈 테지만, 그래도 어쩐지 희망적인 것은 태인이 보여준 이 찰나의 윤리적인 선택 때문일 것이다.



선악은 인간의 개념이다. 동물들에게는 옳다 그르다는 판단에 대한 관념이 개입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생존 앞에서 필요한 일들을 그저 행할 뿐이지 않을까. 그래서 아이러니하다. 입을 닫음으로써 인간 사회에 단절을 드러냈던 태인만이 유일하게 윤리적인 행동을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영화 속 어른들은 각자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비인간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와중 묵언으로 인간적 의미 생산을 중단한 한 사람, 태인만이 가장 인간적인 행위를 한다. 즉 그만이 타자의 부름에 응답한다. 온갖 비윤리 속에서도 침묵하던 태인이 타자의 생존에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응답을 보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껏 일관하던 침묵을 기꺼이 깬다. 이로 인해 선과 악에 대한 섣부른 단정은 금방 상쇄되고 만다.


태인이 행한 윤리는 비언어적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적이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적이게 된다. 소리 없는 소리로 자신의 침묵을 깨고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 목전에 놓인 자신의 생존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윤리 없이 인간 사회는 악의 평범성과 일상화 속에서 계속 비인간적인 행위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침몰시키지 않을까. 영화 <소리도 없이>는 이렇듯 당면한 생존 앞에서 인간의 윤리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소리도 없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행해야 할 윤리가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지를, 조금은 엉뚱하고 조금은 잔혹하게 탐색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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