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시간>
형사 형구(조진웅)는 독한 술을 잔뜩 마신 후, 수사 중이던 집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깨어보니, 자신이 수사 중이던 죽은 인물이 바로 자신이 되어 있었다. 줄곧 알고 있던 자신의 삶은 어디론가 모조리 사라졌고,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누군가의 삶이 내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라진 시간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희미한 흔적들만 남아 유령처럼 떠돌 뿐.
영화는 다소 황당하다. 매일 밤마다 다른 누군가로 빙의되는 여자, 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이 부부의 삶과 죽음에 갑자기 기입된 또 다른 남자 형구. 깨지 않는 꿈처럼 모든 것이 바뀌어 있는 세상 속에서 형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할 수밖에 없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는 자기가 자기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을 놓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 지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엉뚱하면서도 진지하다. 진짜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묻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잔인한 농담처럼 영화는 우스운데 지독히 서글프고 외롭다.
꿈과 현실이 그렇게 다를까? 영원히 꿈에서 깨지 못하면 그게 곧 현실이 되지 않을까? 그럼 깨어 있다고 믿는 지금 이 순간이 과연 현실이라고, 꿈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확신하며 지금을 살고 있을까.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부정당한다면?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영화처럼 결국 체념과 적응의 단계에 이르게 될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믿고 있던 현실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결론짓지는 못하지 않을까.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만의 노스탤지어로 남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는 사라졌지만 나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그것'의 '있었음'을 증명하기에. 그렇다면 결국 '믿음'의 문제인 걸까. 내가 지금을 지금이라 여기기에 지금이 여기에 있는 것일런지. 나는 '나'의 무엇을 '나'라고 믿고 있는 걸까. 사실은 모두 꿈이거나 유령인 것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