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던 날>
"아무도 안 구해줘. 네가 너를 구해야지. 인생이 네 생각보다 길어."
순천댁(이정은)이 세진(노정의)에게 여권을 쥐어주며 건네는 말이다. 순천댁은 외딴섬에서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조카 순정(정지우)을 홀로 돌보며 산다. 삶이 힘들어 들이킨 농약은 그녀의 목소리만 앗아갔을 뿐 목숨은 부지시켰다. 산 송장과 다를 바 없는 순정의 삶도 순천댁에 의해 근근이 연명되는 중이다. 두 사람은 죽음의 그늘 뒷면에서 삶을 이어간다. 그래서 순천댁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세진에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너를 구해주지 않을 것이고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고 말이다. 생각만큼 사람은 쉽게 죽지 않고 그러므로 생(生)은 질기고 더디다.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순천댁은 삶을 포기하려는 세진의 손에 순정의 이름으로 발급받은 여권을 쥐어주며 우리의 몫까지 살아달라고 부탁한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죽음의 경계에서 삶을 이야기한다. 절망, 실패, 좌절 같은 게 전혀 드리우지 않았던 인생에 그것들이 갑작스레 끼어든다면? 비로소 그때에야 죽음이 늘 곁에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인지할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줄줄이 늘어서고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리면서 일상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제 삶은 끈덕지고 비참하고 위태롭고 외롭다. 어딜 가나 죽음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순천댁과 순정, 세진의 삶, 그리고 이들이 사는 공간에 우연히 필연적으로 발을 들어놓은 형사 현수(김혜수)의 삶이 그러하다.
경찰대를 나와 성공 가도를 달리던 현수의 삶은 남편의 불륜과 이혼 소송, 출동 중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한순간에 일그러진다. 가까스로 삶을 지탱하고 있던 현수는 복직을 앞두고 비리 사건의 증인으로 경찰의 보호를 받던 여고생의 실종 사건을 자살로 처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 해 간신히 버티고 있던 현수의 눈에 세진의 몸부림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라진 세진의 흔적을 찾기 위해 CCTV를 돌려보던 현수는 세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해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들어도 다음 날 아침에는 몽롱한 상태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멍하게 일어나 앉아 있는 그 모습.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세진의 고투를 현수는 알아차린다. 혈육도, 어렵게 마음을 주었던 남자도 모두 떠나고 외딴섬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아이가 보내는 극단적인 신호가 살고 싶다는, 봐 달라는 SOS임을 홀로 알아챈 순천댁처럼.
현수는 CCTV 화면 속에서 죽으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악하는 세진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겹쳐 보면서 현수는 세진이 자살했을 리 없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현수는 순천댁과 세진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연대의 감정은 끝내 현수로 하여금 제복을 벗어버리고 세진을 만나기 위해 떠나도록 만든 동력이 된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인연이 맺어진다.
녹록지 않은 인생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다는 순천댁의 단호하면서도 잔혹한 확신은 잔인하게도 자명한 사실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살지 남이 살아주지 않는 것처럼 나의 구원은 나의 몫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다. 세진 옆에 순천댁이 있었듯, 이 두 사람에게 현수가 다가왔듯, 소리 없는 비명에도 응답할 수 있는 누군가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그리하여 마침내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 부정하고 체념하고 후회하면서 불행을 온전히 대면하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죽여야, 또 다른 자신과 함께 곁을 지킬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내가 죽던 날>은 죽음의 그늘 아래를 지나 그 뒷면에서 다시 서로의 삶을 함께 이어간 사람들을 담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