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부고는 카톡 단톡방으로 왔다. 발신자는 상주 본인이었다. 나는 나라면 어찌했을까를 생각한다. 경험해보지 못 한 큰 슬픔을 마주했을 때, 나는 평소보다 이성적이 될까 감성적이 될까? 어떤 본능은 자신을 바쁘게 만들 일들을 떠올려 애써 슬픔을 따돌려보려 할 것이다. 그저 펑펑 울어버리는 본능보다 더 잽싸게 움직이는 그런 본능도 있으리라고, 이해해본다.
늘 냉정한 면이 있는 친구였다. 아쉬운 일이 있어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 그 친구의 현명함이었다. 그런 그를 대할 때 적잖이 서운할 때도 있었으나 나에게 나만의 방어기재가 있듯 그에게도 유리같은 그의 마음을 지켜줄 '자동 냉각 장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차갑게, 아무렇지 않게, 객관적인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나면 제법 많은 일들에 '괜찮을' 수 있다. 보통보다 예민했던 친구는 늘 자신을 그렇게 지켰고, 한 세계가 무너지는 슬픔 앞에서도 착착착, 순서에 맞춰 할 일을 해내는 것이 그의 '괜찮아지는' 방식이었다. 그래, 여기까지가 내가 이해하는 그의 방식.
관계의 깊이는 젤리 같다. 매우 깊지만 막상 파고들기 어려운 진득한 관계.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표현은 늘 피상적이다. 자주 만나지도 않고 애정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겉보기 등급만 보면 낯설다. 매우 가깝지만 사실 가깝지 않은 관계, 밀도가 낮은 관계도 있다. 늘 근황을 업데이트하고 세세한 습관까지 꿰고 있지만 상대의 슬픔에 나까지 눈물이 펑펑 쏟아지지는 않는 관계. 아니, 상대가 슬픔을 애써 억누를 때 나도 이를 악물게 되지는 않는 관계. 그런 점성이 낮은 묽은 젤리 같은 관계도 있다. 매일 나눈 속깊은 대화 따위, 깊어 보였지만 껍질인 그런 관계.
나는 눈치를 본다. 얼마나 길고 진지하게 조의를 표해야 할까? 물보다 진한 점성을 가진 우리의 관계에는 섣부른 위로 멘트들이 어울리지 않는다. 힘들겠다, 라든지 아버님께서 좋은 곳에 가시길 빌게, 라든지. 긴 말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건 내가 그 친구를 완전한 타인으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일 거다. 덕분에 우리 사이에는 별 말이 없다. 한 마디, 인사말이 가고, 한 마디, 답례말이 온다. 나는 더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긴 말은 어쩐지 예의가 없어 보인다.
슬픔 앞에서 척척, 할 일들을 잘 하고 있을 친구를 떠올린다. 지금 새벽에는 아마, 자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일의 바쁜 일정을 위해 잠들 수 있다는 자신의 객관성을 완성하기 위해. 그렇게 스스로 슬픔으로 인식하지 않는 슬픔들에는 슬픔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들은 굳이 그것이 슬프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일기에 적어둔다. 당사자는 굳이 기록하지 않는 감정이 남의 서재에 남아 있어서, 세상 슬픔의 무게는 늘 알려진 것보다 무겁다. 관계마다 다른 밀도가 슬픔의 밀도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친구 아버지에 대한 나의 조의는 친구의 모드에 맞춰 매우 객관적이고 간결하였으나 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슬픔을 견뎌내고 있을 친구가 걱정되고,슬픔을 이겨내는 것을 잘 하는 일이라며 자신을 격려할 친구의 마음이 슬펐다. 친구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두고두고 추억하며 슬퍼할 것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슬퍼할 여유가 없을 것이기에, 내가 대신 적는다. 견뎌내는 네가 슬퍼 보였다고. 넋 놓고 울어대지 못하는 사회화 된 우리들의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고.
아버님의 명복을. 하지만 뵌 적 없는 그 분보다 네 마음의 평화를. 네가 그 슬픔을 너의 방식으로 잘 견뎌내기를. 그래서 오늘 참았던 슬픔이 언제든 너를 흔들 때에도 여전히 괜찮기를 바랄게. 삼가,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