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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 Nov 16. 2019

[비행일기] 싸구려 서비스의 끝은 송구스러움

cx745 홍콩발 두바이행 밤비행. 승객들을 살펴보니 하얀색 히잡을 쓴 아시안 무슬림들이 사우디로 순례 여행을 가는 길이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무슬림들이 순례 여행을 가는 것은 종종 목격했는데 오늘은 그들이 단체로 걸친 병아리처럼 노란 조끼에 Hajj Philippines 라고 써있다. 필리핀 무슬림은 처음 본다. 카톨릭 국가인줄 알았더니. 인도네시안이나 말레이시안 무슬림보다는 영어를 훨씬 잘해 서비스가 수월하다.


그런데 영어를 잘하시다보니 카트가 나갈 수 없게 여기저기서 "미스! 미스! 커피! 워터!" 하며 붙잡고 자꾸만 나의 소중한 옆구리를 쿡쿡 찌르신다. 옆구리 찔림을 여러 번 당하자 미소가 점점 사라지고 얼굴이 굳어간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차례가 갈텐데도 저 멀리서 “미스! 미스!” 하며 나를 애타게 부르시는 승객에게 "웨잇!" 이라는 차갑고 싸늘한 한마디를 쏘아 부친다.


서비스를 마친 후 갤리에 들어가 홍콩 동료에게 "진짜 음료 엄청 마신다! 그치?!" 라며 짜증 섞인 푸념을 내뱉으며 맞장구 쳐주길 내심 기다리고 있는데 "응, 전형적인 필리피노들이네" 라는 담담한 그녀의 대답에 왠지 모를 서운한 마음까지 든다.


두바이 비행은 밤비행이라 식사 서비스가 끝나면 조용해지기 마련인데 이 순례객들, 도통 주무시질 않고 자꾸만 실수로 콜버튼을 눌러, 부은 다리를 이끌고 가서 "뭐 필요하세요?" 라고 물어보면 순진무구한 얼굴로 "No" 하신다. 잘 몰라서 그러시는 건데 어쩔수 없지 하면서도 참 오늘 비행 이래저래 힘들다.


편치 않은 비행을 우여곡절 끝에 마치고 크루싯에 앉아 착륙을 기다리며 승객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할머니 승객들이 쓰고 계신 히잡에 손수 수를 놓은 것 같은 촌스러운 꽃무늬와 색색깔의 비즈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보니 흰색 히잡에 맞춰 히잡 끝에 흰색 레이스까지 총총 달았다.


문득 어디선가 보았던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무슬림들은 그들이 예언자로 추앙하는 모하메트의 고향 사우디아라비아로 성지순례를 떠나기 위해 평생 돈을 모아 평생 한번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한평생을 피땀 흘려 일해 모은 돈으로 산 비행기 티켓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탔을 비행기. 그들의 평생 노고값에 비해 오늘 내 서비스는 너무 싸구려였다는 생각이 들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여 마음이 싱숭생숭 해진다. 아.. 좀 잘해드릴걸.. 한번 더 웃어드리고 한번 더 대화라도 해드릴걸.. 서비스가 좀 늦춰진다 해서 세상 끝나는 것도 아닌데 난 서비스 빨리 끝내기에 왜 그리 급급해 정작 서비스의 질은 바닥으로 끌어내렸나 하는 생각에 후회가 급 밀려온다.


두바이에 착륙 후, 성지 순례객들은 사우디까지 가야해서 자리에 남아있고 두바이에서 내리는 크루들은 짐을 싸서 비행기에서 빠져나왔다. 가방을 끌고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뒤에서 몇몇 승객들이 "땡큐, 바이~" "바이바이 땡큐!" 라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내 후진 서비스를 받으시고도 땡큐라니. 민망함과 송구스러움이 뒤섞여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비행기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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