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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 Nov 16. 2019

[비행일기]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크리시는 단발머리에다 이렇게 말하면 좀 뭣하지만, 파충류 같은 쫙 찢어진 못되게 생긴 눈을 가진 홍콩 크루다. 쥬니어 크루들에게는 말도 안 걸고 찬바람만 쌩쌩 날리다가 갤리 퍼서나 사무장 같은 시니어들에게만 그 파충류의 눈으로 눈이 없어져라 웃어가며 말을 건다. 가만 보니 쥬니어 크루들에게도 웃으며 말을 걸 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시니어들이 지켜보고 있을 때이다.

이 아이와 같은 갤리에서 일한 홍콩-뉴욕행 비행.
나는 안중에도 없고 우리 갤리 퍼서인 일본인 나나코에게만 굽신굽신 하느라 정신이 없다. 심지어는 내가 말을 걸어도 중간에서 말 자르기, 대꾸 안하기 등등 화나기 최고로 적합한 상황을 자꾸만 만들어준다. 15시간이라는 긴 여정을 이 아이와 함께 하려니 이렇게 고역일 수가 없다.

어차피 이 파충류녀가 시니어도 아니고 나도 똑같이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뭔가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잘 참지 못한다. 잘 참지 못한다는 게 욱해서 나 왜 무시해! 라며 따지고 바로 잡으려고 할 만큼 화끈하고 열정적인 성격은 못되고, 그냥 적어도 함께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둥글둥글 사이좋게 넘기고 싶은, 소심하다면 소심하고 원만하다면 원만한 성격이다.

물론 크리시에게서 몇번의 째림과 말 잘림을 당하자 부글부글 속이 끓는다. 그래도 내 생활 지침인 '웃는 낯에 침 못뱉는다' 를 적용해 끓는 속을 가라앉히고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한번 파충류녀에게 말을 건다.

"크리시, 너 뉴욕 가면 뭐할꺼야?"
"크리시, 크루 레스트 동안 잠은 잘 잤니?"

이렇게 파충류녀에게 살갑게 대하자 그녀도 슬슬 속에 있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예전에 같이 비행했던 유명한 사무장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엄마도 그런 스타일이야" 라고 한다. "우리 엄마도 본인이 행복하지 못해서 주위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스타일이야. 본인이 행복하지 못하니 자꾸 주위 사람을 닦달해서 자기를 기쁘게 해주길 바래."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소년탐정 김전일처럼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왜 이 파충류녀가 이런 눈을 가졌는지, 왜 시니어에게만 굽신거리며 주니어들은 무시하는지, 아- 그랬구나. 라며 갑자기 파충류녀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도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없으니 그냥 "그래, 그런 사람들이 있어. 자기 행복은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말이지." 라는 감동 없는 그저 그런 시시한 말을 내뱉었다.

예전에는 주위를 힘들게 하는 크루들을 만나면 '사람 참 성격 못됐네. 왜 저러고 사냐!?' 이러면서 속으로 욕했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겪어보면서, 주위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사실은 본인도 힘들고 마음이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이먼 챈이라는 유명 사무장 리스트에 있는 사무장이 있는데 그와 함께 비행을 하게 되어서 두근두근하며 브리핑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는 브리핑 때는 좀 깐깐한 스타일처럼 보여서 비행 가면 힘들겠군 싶었는데 막상 함께 일 할때는 그렇게 인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크루들에게 " 사이먼 챈 유명한 사무장 아냐?! 왜 저리 좋아?" 라고 물어보자 "예전에 아내가 아플 때" 유명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다고 대답했다.

본인 마음이 아프면 남의 마음이 아픈지 어떤지 돌아볼 여유가 당연히 없을테니 다른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못되게 굴 수밖에 없다는 작지만 중요한 사실을 몸소 체험하게 되자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진상 승무원들의 아픈 마음이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을 직접 만나면 스트레스 쌓이고 일할 맛 안나고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나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본인이 힘들어서 그러는구나 라는걸 알게 되자 나의 마음은 그들을 만나도 한결 덜 아프게 되었다. 그들의 아픈 마음을 알게 되자 내 마음이 덜 아프게 되었다니, 뭔가 아이러니하다.

그나저나 뉴욕에서 홍콩으로 돌아갈 때 파충류녀랑 또 같은 갤리에서 일 해야 할텐데 마음은 덜 아파졌다 해도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파충류녀야, 아니, 크리시, 다음 섹터에서는 우리 더 잘 지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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