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X828 홍콩발 토론토행 비행기. 오늘 비행은 만석이다. 비즈니스 클래스에 단 한 좌석도 빈 좌석이 없이 만석인데 오늘 나는 비즈니스 클래스 당첨이다. 그래도 미주 비행은 비즈니스에서 일하는게 이코노미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우리 항공사는 장비행에서 이코노미 클래스에 컵 누들을 제공하는 것을 시그니쳐 서비스로 하고 있는데 식사 서비스가 끝나고 한숨 좀 돌리려고 하면 콜벨이 끊임없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누들 파티가 시작된다. 유러피안이 많은 유럽 포트보다 중국인, 홍콩인이 많은 미주 비행에서 컵누들이 불티나게 나가는데 점점 중국인이 많아지는 유럽 포트도 요즘에는 만만치 않은 컵누들 베스트 셀러 비행이 되어가고 있다. 오죽하면 미주 비행은 ‘걸어서 토론토까지’ 라고 할 정도이다.
어쨌든 오늘은 비즈니스에서 일하니 컵누들 파티의 호스티스가 되지 않아도 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륙 준비를 하는데, 승객들이 모두 보딩을 마치고 비행기 문을 닫고 런웨이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의 갤리 퍼서 필리피노 모나가 갑자기 “세상에! 머그컵이 없어!” 라고 외쳤다.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들에게 뜨거운 음료를 서비스 할 때 필수품인 머그컵이 없다니! 이건 마치 군인이 총알까진 아니더라도 빤질빤질 잘 닦여진 군화 없이 맨발로 전쟁에 참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Oh my God!" "Oh no!" "Holy cow!" "Shit!" 등 온갖 감탄사가 크루들 사이에서 새어나온다. 홀리카우는 신선한데?
어쨌든 비행기는 이미 런웨이를 달리고 있는 상태. 응급 상황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게이트로 되돌아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 클래스의 플라스틱 일회용 컵을 사용하기로 한다. 보기엔 너무 안좋지만 15시간 긴 비행동안 비즈니스에서 뜨거운 음료를 서비스하지 않을 순 없으니 말이다.
이래저래 첫 번째 서비스가 끝나고 승객 한분이 비즈니스의 스낵인 새우 완탕면을 주문하셨다. 완탕면을 준비하려고 보니 아니, 이번에는 누들볼이 없다. “Oh my God!" "No way!" 다시 한번 감탄사의 향연이 펼쳐지고, 완탕면을 어디에 담아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코노미 클래스의 컵누들을 가져다가 내용물을 버리고 컵만 활용하기로 한다. 역시 보기에는 너무 안좋지만, 크리스탈 유리잔이나 넓적한 접시에 완탕면을 담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보아하니 각종 접시와 컵, 볼이 들어가 있는 차이나 카트가 2개 실렸어야 하는데 하나만 실린 모양이다. 미주 비행에 이용하는 보잉 773H 기종은 비즈니스 클래스 갤리가 Door1과 Door2 두 군데로 나누어져 있는데 케이터러는 앞 갤리에 차이나 카트가 다 실렸다고 했고 모나는 비행준비로 한창 바쁘다보니 직접 확인하지 않고 케이터러 말만 믿었던 모양이다. 갤리 퍼서의 임무 중 하나가 비행에 필요한 물건들과 음식들이 제대로 실렸나를 비행기 문 닫기 전에 체크하는 것인데, 다행히도 오늘의 시니어 퍼서인 태국인 와라와 홍콩 사무장 데이지는 그 어느 누구도 나무라지 않는다. 깐깐한 시니어들이었다면 벌써 한소리 해서 갤리 분위기를 10톤짜리 공룡 마냥 무겁게 만들고도 남았을텐데, 시종일관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그녀들 덕분에 서비스에 필수적인 것들이 빠진 상황에서도 “크루들은 참 창의적이야. 없어도 다 만들어내잖아” 라는 우스갯소리와 한바탕 웃음으로 이 상황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회사에 보고할 리포트는 써야했지만.
누군가가 고의가 아닌 실수를 저질렀을 때 우리에게는 두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1. 이미 저지른 실수를 돌이킬 수는 없으니 따뜻한 말 한마디와 미소를 건넴으로써 용기를 주어 실수를 만회하도록 한다.2. 이미 저지른 실수에 대해 책망하고 꾸짖어 스스로 자책하고 절망하게 만든다.
비행을 하며 많은 승객과 승무원들을 만나다보면, 수도 없이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 중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실수가 있다. 하나는 물,쥬스를 혼합해서 승객에게 쏟아버린 실수, 또 하나는 카트로 승객의 무릎을 세게 쳐버린 실수. 첫번째 실수는 인도 승객 두분에게 저지른 실수. Pre-poured drinks 서비스를 나가다가 다리를 삐끗하지도 않았는데 대체 왜 그랬는지 스스로 트레이를 뒤집어 엎어버렸다. 바로 앞에 앉아있던 인도 승객 두분에게 물, 오렌지 쥬스, 사과 쥬스를 멋지게 혼합해서 홀라당 쏟아버렸는데 내가 승객이었더라도 화가 날 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승객들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해주셨다.
그들의 너그러움에 감동한 나는 그 후 그들에게 계속 샌드위치, 땅콩, 과자, 음료수 등 기내에 있는 모든 것들과 입이 찢어질 것 같은 함박웃음을 갖다 바치며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했었다.
두번째 실수는 이러하다. 어딘지 기억도 나지 않는 장비행이었다. 첫번째 식사 서비스 후 몇시간이 지나고 착륙 전 두번째 식사 서비스를 하기 위해 칠흑같이 어둡던 기내의 불을 켰다. 한 승객이 딩동, 콜벨을 눌렀다. 잘 생기고 젊은 서양인 남자 승객이었다.
"뭐 필요하세요?" "(세상 불쾌한 일은 다 겪은 표정으로) 불 왜 켰어? 나 자야하는데?" "죄송하지만 두번째 식사 서비스를 해야해서요.""(한참 불평을 하다가) 나 계속 잘테니까 절대 깨우지마" '아, 저 승객 잘못 건드리지 말아야지' 생각하고는 식사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카트를 밀고 가다가 그만 그 승객의 무릎을 카트로 엄청 세게 쳐버린것. 식사와 음료가 가득 실린 카트는 100kg은 너끈히 넘을건데. 내가 봐도 엄청나게 아팠을 거다. 불만 덩어리 승객에게 '잘해야지, 실수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고 긴장한 순간 정말 큰 실수를 하필 그 승객에게 저질러 버린 것. 승객은 한참 동안 각종 욕과 불평 불만을 폭발시켰고 한참을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던 나는 그 후로 그 승객 앞에는 알짱거리지도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실수를 저지른 나에게 첫번째 상황의 손님은 <1.이미 저지른 실수를 돌이킬 수는 없으니 따뜻한 말 한마디와 미소를 건넴으로써 용기를 주어 실수를 만회하도록 한다>를 선택해 내 스스로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고, 두번째 상황의 손님은 <2.이미 저지른 실수에 대해 책망하고 꾸짖어 스스로 자책하고 절망하게 만든다> 를 선택해 절망한 내가 다시는 알짱거리지도 않고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갖지도 못하게 하셨다.
나라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시점이라면 1번을 선택하고 싶다. 실수 메이커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면 실수를 만회하려고 노력하는 실수 메이커의 노력으로 더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쿨남쿨녀라는 평판을 얻을 수 있는건 덤.
이번 비행에서도 쿨하게 1번을 택한 와라와 데이지 덕분에 지옥같을 수도 있었던 16시간의 비행이 즐겁고 화기애애하고 감사했다.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이코노미의 식기들로 서비스 해야 했던 우리를 이해해주셨던 승객들이 최고의 미소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