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드니 비행이다. 오늘 우리 갤리에는 이제 비행 시작한지 갓 두달 된 병아리 승무원들이 두명이나 있다. 시드니가 처음이라는 두 병아리들에게 필리피노 갤리퍼서 크리스틴은 본인이 신나서 시드니에 가면 타롱가 동물원도 가고, 아쿠아리움도 가라며 여기저기 추천을 해준다. 그런데 크리스틴이 추천하는 곳을 가만히 들어보니 다 내가 안가본 곳이다.
그 동안 시드니에 열번 이상은 왔을거다. 처음 한 두번 왔을 때나 신나서 오페라 하우스와 록스 마켓에 구경 갔었지 세번째 쯤부터는 그냥 호텔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 가끔 스타벅스에 들어가 차 마시며 책 읽는 것으로 만족하곤 한다. 시드니 뿐만 아니라 어느 아웃포트에 가도 요즘은 똑같다. 이제 아웃포트가 새롭고 신나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탓도 있고 언제든 다시 오면 되니 이번에는 좀 쉬자 라는 게으름뱅이의 마음이 늘 탐험가의 마음을 이기는 탓이다.
크리스틴은 눈이 동그래져서는 "너 비행 5년차인데 타롱가 동물원도 안가봤어? 블루마운틴도 안가봤다고? 진짜?" 라며 거듭 확인하고 나는 왠지 모르게 민망해진다.
늘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은 권태롭다. 비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5년차 승무원의 비행도 권태롭다. 최근 들어서는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왠지 인생 자체가 뻔하고 지루한 느낌마저 든다. 갖고 싶은 직업도 가졌고 결혼도 했고. 인생의 대사라는 것들을 다 치루어버려서인지 이제 내 인생은 그냥 이대로 소소하게 흘러가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일까. 누가 보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권태로운 삶이 몇달째 지속되니 의욕도 별로 없고 권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크리스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녀가 추천하는 곳들이 다 내가 일상으로 드나들던 우리 시드니 호텔 주변 달링하버에 있는 것들이다. 아, 일상에서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즐겁게 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 더 신나게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과 대화하다 남편이 문득 우리집 가훈은 "아직 몰라 우리 인생 두근두근 우리 인생" 으로 정하자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다. 이제 겨우 30년 남짓 살고는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가 살아온 기간의 두배 정도는 더 살텐데 벌써 인생을 다 알아버렸다는 듯이 권태에 잠식당해 버린 내 자신이 부끄럽다.
오늘은 큰 맘 먹고 게으름을 떨쳐버리고는 내 행동 반경을 넓혀본다. 하버 브릿지를 걸어서 건넌다. 다리 밑 물결 위에 반짝이는 별들이 끝이 없다. 시드니 다운타운으로 건너가 퀸 빅토리아 빌딩과 웨스트필드에서 윈도우 쇼핑을 즐겨본다. 멀리 보이는 고전적인 양식의 건물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 새 5년만에 처음 보는 하이드 공원에 들어와있다. 키가 30미터는 되어 보이는 울창한 나무숲이 아름답다. 말 그대로 짙푸른 녹음이었다. 동화 속 빨간모자가 지나간 숲속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분수대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청년, 파란 잔디밭에 앉아 담소를 즐기는 단란한 가족. 이런 풍경을 일상으로 볼 수 있다니, 내 일상은 참 아름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