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유, 자존심
이 책을 집어 든 당신은 누구 이신가요? 또 어떤 이유로 이 책을 선택하셨나요? 정말 궁금해요.
어쩌면 당신은 넝마같이 지쳐버린 퇴근길, "당장 이놈의 회사 그만둬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꺼내 들었을 거예요. "퇴사하고 공방을 창업했다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하는 작은 호기심에 이 책을 선택했을 수도 있고요. 혹여나 당신에게는 꼬깃꼬깃 남몰래 접어 두었던 작은 꿈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꿈을 다시 펼쳐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당신의 발걸음을 이 책으로 이끌어 주었을지도요.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엄청난 인연이에요. 믿기지 않지만 매주 1,200권이 넘는 새로운 책이 출판된다고 해요. 1년이면 무려 65,000권! 당신은 밤하늘의 별 같이 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발견한 거예요. 우연히 고개를 들었는데 딱! 포착 된 별똥별처럼요!
그토록 특별한 당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죠. 그러니 지금부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저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해요. 저도 모르게 시작하고, 저도 모르게 끝났던 짠내 나는 첫사랑 이야기 말이에요.
저는 첫사랑의 그와 10년을 가까이 함께 했답니다. 처음 만날 당시 저는 그에게 푹 빠져 있었어요. 하지만 첫사랑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저는 참 어설펐죠. 어떻게 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아니 제 마음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어요. 그저 그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었어요. 스스로 닳아 없어질 지경이 될 때까지 말이죠.
그를 위해서 처음으로 정장을 입었어요. 무지외반증인 제 발에 맞지 않는 높은 하이힐도 신었지요. 조금 불편하면 어때요. 억지로 욱여넣은 발뒤꿈치에서 피가 나고 물집이 생기면 또 어때요. 그를 위해서 가장 예쁘고, 가장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을요.
2년 동안은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서 그를 만나러 갔어요. 해도 뜨지 않은 어스름한 시간에 집에서 출발했죠. 지하철을 3번 갈아타고,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지하철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무려 5개의 이동수단을 타고 2시간에 걸쳐 그를 찾아갔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요.
저의 헌신에 그가 고마워했냐고요? 그럴 리가요. 그는 저의 모든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죠. 우스운 건 저도 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었다는 거예요. 그런 도도한 태도마저 멋져 보일 정도였으니, 제가 정말 푹 빠졌긴 했었나 봐요.
콩깍지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몸이 먼저 위기 신호를 보냈지요. 로션 없이도 윤기가 돌던 피부는 생기를 잃었어요. 무엇을 먹어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고요. 어떤 아침은 트리플샷도 모자라 4샷, 5샷을 넣은 커피를 원샷해야 겨우 깨어 있을 수 있었어요.
처음의 뜨거운 열정이 식자 그제야 그의 민낯이 보였답니다. 그는 생각보다 고리타분하고, 답답했어요. 크고 작은 다툼도 잦아졌지요.
그가 뭐라고, 그를 위해 지금까지 희생해 왔을까? 그럼에도 차마 헤어질 용기는 없었어요. 그가 없는 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죠. 주변 사람들도 제가 그와 헤어지면 큰일 날 것처럼 겁을 주곤 했으니까요. 몸과 마음이 점점 갉아 들어갔어요.
점점 그를 피해 다녔어요. 그와 엇비슷한 형태만 보여도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고요. 그를 만나기로 한 어떤 아침에는 ‘다리라도 삐면 오늘은 집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미련한 상상까지 했답니다. 끊지도 못하고, 마음을 다 하지도 못했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던 걸까요? 첫사랑인 그와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었을 뿐인데.
문득, 처음 만났을 때 원하던 엔딩은 이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꿈꾸던 모습은 단순히 '그와 함께 하는 미래'가 아니었어요. ‘그와 함께 윈윈 (win-win)하는 미래'였죠.
거울 속 제 모습은 이미 빛을 바라가고 있었어요. 제 눈에 비친 그의 모습 역시 군데군데 파이고, 문드러져 있었죠. 사랑이라면 응당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빛나게 해 주었을 텐데. 우리의 관계는 사포질 같았죠. 마찰될수록 서로의 반짝임을 갉아먹고 있었어요. 아, 이별이 다가오는구나.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예견된 새드엔딩이라면 엔딩을 바꾸어야겠죠. 불편한 정장을 벗어던졌어요. 발에 맞지 않는 하이힐도 있는 힘껏 멀리 던져버렸지요. 또 다른 이야기 속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말이에요.
2월의 마지막 날. 드디어 그에게 통보했답니다.
이제 안녕.
눈치 빠른 당신이라면 이쯤에서 알아채셨겠지요? 제 첫사랑의 존재를요.
저의 첫사랑은 다름 아닌 저의 첫 회사였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입사가 결정된 훈장 같은 회사였어요. 당시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 하던 선망의 회사였으니까요.
입사 일, 제 어깨는 파워숄더를 장착한 듯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어요. 목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 남들보다 빨리 입사했으니 남들보다 빨리 진급하겠지? 최연소 대리, 최연소 과장, 최연소 부장! 그러다 보면 최연소로 임원도 되고 뉴스에도 멋지게 나올 거야. 잔뜩 부푼 마음으로 춤추듯 걸어갔던 첫 출근길. 그날은 두둥실 공중에 살짝 떠있는 듯한 묘한 착각마저 들었답니다.
제 앞에는 눈부신 미래가 펼쳐져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오직 성공한 사람들만이 걸어갈 수 있다는 와인색 비로도 카펫! 그것이 바로 제가 걸어갈 길이었죠. 한 손에는 샴페인잔을 들고 홀짝대며 우아하게 사뿐사뿐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 환상이 와장창 산산조각 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답니다. 회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어요. 상사들의 말처럼 오랜 해외 생활을 했던 탓인지, 유독 어려서 그랬는지, 혹은 여자라 그랬는지.
“왜?”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 한 아기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왜’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올랐어요. 회사는 앨리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진 이상한 나라 같았죠. 그동안 제가 배워온 공식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어요. 1+1이 2가 아닌 0이 되기도, -100이 되기도 했어요. 저는 분명 “아”라고 말했는데 상대방은 “뿅”이라고 듣고 화내기도 했죠.
어, 이상하다? 학교 다닐 때처럼 열심히만 하면 100점 맞는 게 아니었나? 애를 쓰면 쓸수록 제가 그리던 미래와는 점점 멀어져 갔어요. 발버둥 칠 수록 점점 깊이 빠져드는 늪에 발을 헛디딘 기분이었죠. 어느 순간 깨닫고 말았습니다. 성공한 회사원이 되려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상사의 지시에 “네”라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진짜 정답이 아닌 회사가 바라는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뭐,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후였지만요.
부득부득 퇴사일은 2월의 마지막 날을 택했어요. 6개월만 더 버티면 10년 근속이었고, 그게 어렵다면 하루라도 더 다녀 3월 1일에 퇴사하는 것이 이득이었는데. 저는 그날이어야만 했어요. 그날보다 하루라도 늦을 수 없었죠!
그 해 3월 1일에는 저보다 3년 늦게 입사 한 후배들이 과장으로 진급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하하 저요? 조기 진급은 커녕, 굴욕적인 진급 누락을 앞둔 만년 대리 신세였죠. 1년 누락도, 2년 누락도 아닌, 무려 3년 누락 말이에요! 다음날인 3월 1일이 되면 회사 시스템 상으로 그 모든 변화가 반영될 예정이었어요. 제 뒤통수에는 뒷담 화하기 딱 좋은 [낙오자]의 주홍글씨가 막 새겨지려 하고 있었어요.
‘야, 들었어? 정대리 말이야…’
그것만은 막아야 했어요. 절대로요! 2월의 마지막 날 퇴사를 결심했던 건 그날, 단 하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였던 거지요.
다행히 저의 소중한 자존심은 붕괴 직전에 구출 되었답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어요. 최소 수백만 원의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했으니까요. 후회하냐고요? 시간을 수백 번, 수천 번 돌아간대도 저는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랍니다.
아니, 어차피 퇴사할 거라면 실속 있게 계산기 두드렸어야지. 제일 좋은 날 요리조리 골라서 나왔어야지. 그까짓 자존심이 뭐라고. 뭘 그리 후다닥 도망치듯 뛰쳐나왔을까요.
고백하자면 9년 6개월 동안 회사는 저에게 회사, 그 이상의 존재였어요. 회사는 저의 옷이었고, 훈장이었고, 이름표였지요. 맞아요. 징글징글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절대 떼어낼 수 없었어요. 마치 몸의 일부처럼요.
강산이 변한다는 10여 년 동안 가장 좋았던 날, 가장 슬펐던 날, 가장 신나게 웃었던 날, 가장 펑펑 울었던 날. 그 모든 날을 회사와 함께 겪었어요. 난생처음 해 본 일, 난생처음 먹어 본 음식, 난생처음 가본 나라, 난생처음 알게 된 단어들, 난생처음 만나 본 사람들. 셀 수 없이 많은 처음을 회사를 통해 경험했고요.
가장 예쁘다는 20대의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었죠. 내 안의 가장 격렬한 감정과 가장 깊은 내면을 보게 해 주었던 미워도 미워할 수 없었던 존재. 인정하기는 싫지만 회사는 저의 첫사랑이었답니다.
역설적이지만 저는 회사를 ‘잘’ 다니고 싶었기 때문에 퇴사했어요. 잘해보고 싶었는데, 더 이상 잘 다닐 수 없겠다는 슬픈 현실이 퇴사를 결심하게 했던 것이죠.
누구든 그렇잖아요. 첫사랑에게는 언제까지나 가장 예쁜 모습,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고 싶은 것 아니겠어요? 이빨에 고춧가루를 잔뜻 끼운 채, 3일쯤 감지 않은 기름진 머리로,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찍찍 슬리퍼를 끄는 모습으로 첫사랑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어요!
비단 돈벌이 수단이었을 뿐이었다면 저는 아마 회사를 계속 다녔을 거예요. 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만큼, 구차한 관계를 이어가기 싫었던 것이죠.
당신은 어떤 이유로 퇴사하고 싶으실까요? 혹은 이미 퇴사를 결정했을까요?
당신도 그때의 저처럼, 막막한 현실 앞에 퇴사를 결심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잘’ 다니고 싶었을 텐데. 잘 다닐 수 없는 다양한 상황에 맞닥뜨렸겠죠. 소통되지 않는 상사, 적성에 맞지 않는 업무, 복잡한 사내 정치, 업무에 비해 적은 월급. 어쩌면 그 모든 이유 일 수도 있겠고요.
아마도 이 책을 발견 한 당신에게 필요한 건 그때 제게 필요했던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막 퇴사를 결정했던 시기의 제가 목말라했던 용기와 자신감 말이에요. 당신에게 넉넉히 나누어 드릴게요. 이 책을 덮을 즈음엔 당신이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자, 준비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