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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봉봉 Aug 18. 2023

훗, 애도 낳았는데 유리천장 하나 못 깰 것 같아?

세 번째 이유, 출산




“유리천장? 21세기에 그런 게 어딨어? 그거 무려 40년이나 지난 고리타분한 얘기잖아!"


설령 진짜 유리천장이라는 게 제 눈앞에 나타난다면, 까짓 거, 부수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죠.






유리천장 (glass ceiling)이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여성들이 사회생활에서 더 높은 포지션을 향해 올라갈 때 마주하는 장벽을 의미하죠. 투명한 유리처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는 1986년에 월스트리트 저널 (The Wall Street Journal)에서 가장 먼저 사용 한 개념입니다.


막 입사 한 신입사원 시절, 유리천장이라는 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코웃음 쳤지요. “유리천장? 21세기에 그런 게 어딨어? 그거 무려 40년이나 지난 고리타분한 얘기잖아!"라고 말이에요. 설령 진짜 유리천장이라는 게 제 눈앞에 나타난다면, 까짓 거, 부수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죠.


저는 90년대의 순정만화 속 여주인공들을 보며 자랐어요. 그들은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맞서 싸웠어요. 거친 운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했죠. 치마 교복을 입고도 거침없이 담장을 뛰어넘었고요.


그들은 저의 롤모델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들처럼, 원하면 무엇이든 이겨내고 쟁취할 수 있다 믿었어요.






입사 7년 차, 드디어 그 유리천장 이란 녀석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출산과 함께요.


몇 년 전, KB 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서는 [한국 워킹맘보고서]라는 조사를 발표합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무려 워킹맘의 95%가 '퇴사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라고 해요. 특히 초등학생 이하 나이의 자녀를 둔 워킹맘들이 퇴사에 대해 가장 많은 고민을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일과 육아 사이에 선 워킹맘들의 고민. 비단 오늘 만의 이야기일까요. 아주 오래전, 섬집아기에 나오는 해녀 엄마 역시 매일 고민을 하며 출근을 했었지요. 굴을 더 따야 하나, 아기를 보러 돌아가야 하나.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니었어요.


출산과 함께, 엄마가 되었습니다. 엄마는 아기의 세상이 되었고, 아기는 엄마의 세상이 되었지요.


“으앵!”


배가 고파도, 잠이 와도, 씻고 싶어도... 아기가 울면 달려갔어요. 모든 욕구를 온전히 내려놓은 처절 한 삶이었죠. 아무리 매 순간 정성을 다 해도 아기는 종종 아팠어요. 감기에 걸리거나, 토를 하거나, 피부에 발진이 올라오거나, 열치레를 하기도 했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작은 아기를 두고 회사에 나간단 말인가?’ 본능 밑바닥에서부터 작은 의문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곤 했어요.


복직 시기가 다가오면서 마음은 더욱 혼잡스러웠지요. 그래서 일까요. 많은 엄마들이 이 시기에 퇴사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퇴직금을 손해 보면서도요. 아기를 마음 놓고 부탁할 사람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죠.


저는 1년 3개월 후, 예정에 따라 복직했어요. 호기롭게 “나는 아기가 소중하니 퇴사하겠어!”라고 사표를 던질 만큼의 배짱은 없는 생계형 직장인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오늘은 엄마 일찍 올게"라고 아기에게 매일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쟁이 엄마가 되었습니다. 서둘러 퇴근해도 아기는 항상 잠들어 있었거든요.






신입 사원 시절 한 워킹맘 선배가 “깨어 있는 아기를 보는 시간이 하루 15분 밖에 안 돼”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속으로 ‘미쳤다, 왜 그렇게 살지?’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저였죠. 그런던 제가 그 ‘미친’ 삶의 한 복판에서 버둥대고 있더군요. 매일 밤 자는 아기의 볼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 말했어요. 다음 날 아침은 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단장을 하고 출근을 했지요. 잠자는 아기에게 "오늘은 엄마 일찍 올게"라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요.


아득바득 열심히 살아온 건 그 길 끝에 행복이 있다고 믿어서였어요. 좋은 성적을 받으면, 좋은 학교에 합격하면, 좋은 회사에 입사하면, 좋은 사람과 결혼하면... 끝이 없는 외줄 타기 곡예를 하는 기분이었어요.


어느 퇴근길,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 아저씨가 민망할 정도로 펑펑 울었답니다. 회사에 있을 땐 집에 가야 할 것 같고, 집에 있을 땐 회사에 가야 할 것 같았거든요. 매 순간 영혼이 없는 빈껍데기가 너풀너풀 앉은자리만 바꾸는 것 같았죠.


몸은 하나인데, 어떻게 '좋은 엄마'와 '좋은 회사원', 이 두 가지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제가 가진 시간과 능력이 100이라면, 양쪽 저울에 공평하게 올려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엄마로서도 50점, 회사원으로도 50점. 양쪽 다 낙제점이었죠. 그러니 양쪽에 다 미안해해야 했어요.






유리천장은 엄마가 되니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한계였어요.


혹시 유리에 베여 보신 적이 있나요? 어릴 때 커다란 유리창을 와장창 깬 적이 있어요. 그때 유리 파편 하나가 허벅지 뒤쪽에 박혔나 봐요. 지금도 그곳에 작은 흉터가 움푹 파여 있답니다. 3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말이지요.


유리천장 까짓 거, 저 혼자였다면 거침없이 꿰뚫었을 거예요. 높은 담장을 뛰어넘던 순정만화 속 여주인공들처럼요. 당차게 점프했겠죠.


하지만 저는 한 손에 아기를 품은 엄마가 되었답니다. 더 이상 유리천장을 깨뜨릴 수 없었어요. 아무리 얇은 유리천장이라도 깨지면서 수많은 파편을 만들 테니까요. 누군가 다칠 수도 있겠죠. 제가 될 수도, 아기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저는 가만히 아이를 끌어안고 천장 아래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습니다. 아이를 두고 떠나지 못한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처럼요. 회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한 굵직한 일들을 내려 두었어요. 세 번 갈 회식을 한 번만 갔지요.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발을 뺐어요. 회사에서의 성공보다, 진급보다, 아기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정도로 타협하며 살아가기로 했어요. 항상 1등을 노리며 전력질주를 하던 저에게 생소한 삶이었지만요.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아껴 두고 미뤄둬야 한다고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행복은 '적립식'이 아닌 '복리식'이더라고요. 내일 행복할 수 있으려면 오늘의 '종자 행복'이 있어야 해요. 작은 행복들이 굴려서 커다란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눈곱만 한 지우개 똥을 굴리고 굴려 공처럼 크게 만들 듯 말이에요.


애도 낳았는데 그깟 유리천장 하나 못 깨부술까요. 하지만 엄마가 된 저는 유리천장을 깨지 않아도 행복한 삶을 살기로 결정했답니다.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소곤소곤 속삭였습니다. 잘 자라 우리 아기.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달려올게, 네가 잠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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