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밋밋하고 무난한, 별다른 게 없어 눈에 띄지도 않는, 멋없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 학창 시절에는 꽤 공부를 잘했으니, 공부로 눈에 한번 띄어 봤을 까 다른 방면으로는 별 다르게 눈에 띄어본 적 없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 그 흔하디 흔한 반장도 한번 못해 본 사람. 모범생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선생님들과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평범하게 조용한 학생. 얼굴도 키도 보통은 되려나? 생김새도 평범한 데, 옷 잘 입는 센스도 없어서 외모적으로도 눈에 띌 것 없는 평범한 사람. 그렇다고, 엄청 착하지도 못되지도 않은 성격적으로나 인성적으로도 평범한 사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데, 그런 인연들 중에서 이런 평범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런 평범한 사람이 덜컥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고 나니 뭐를 이야기해야 될까 고민에 휩싸였다. 어릴 적 가정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으니 어릴 적 이야기를 소재로 써볼까 싶었지만,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다 보니 그 시절에는 나처럼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사람이 다반사라 가정사도 평범해진다. 물론, 내 나름대로 하고픈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는 데, 여기저기 에세이를 읽다 보니 모두의 이야기는 특별하고 나는 그저 평범한 가정에 속해 있었구나 싶다.(어찌 보면, 평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데 잘 풀어내지 못한다는 쪽이 더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면, 현실의 이야기를 한번 써 볼까? 평범한 어느 가족에게나 한 명쯤 하고 있을 만한 보통의 일을 하고, 희로애락이라는 보편적인 보통의 감정을 느끼고, 급진적이지도 꼰대같지도 않은 보통의 생각을 하며, 남다르지 않은 보통의 성실함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보통의 일상을 살고 있다. 이 또한, 별다를 것 없는, 특별할 것 없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무색무취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도, 뭐 한 가지 남다를 것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과거를 탈탈 털어본다. 남들이 어떻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남들이 어떻게 지금의 그 혹은 그녀가 되었는지, 남들은 어디를 여행하고 다녔는지, 어디서 얼만큼 공부를 했는지, 지금 어디서 어떻게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기웃기웃해보지만 이야기 속 작가님들의 삶이 특별해 보여서, 내 이야기는 또 평범해진다.
다른 작가님들의 평범한 일상은 특별하게 잘도 쓰여 있는 데, 그런 특별해 보이는 글을 위한 내 노력 또한 유별나지 못하고 평범하다 못해 자칫하면 보통 이하일 수도 있는 노력으로 나의 일상은 특별한 글로 승화되지 못한다.(평범한 일상을, 평범한 생각을, 특별한 것으로 승화시키시는 작가님들은 평소 다독, 다작, 다상량하시는 그 노력들이 존경스러운 분들이다.)
심지어, 그냥 지나쳐가는 일상을 기록할 뿐인데도 단상의 평범함은 특별나 보인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같은 책을 읽었는 데, 난 왜 그런 생각이 안 들었지? 같은 곳을 다녀왔는 데 난 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지? 어쩜, 보이지 않는 생각마저도 마디마디 끊어서 켜켜이 층을 내어 하나하나 세밀하게 잘 펼쳐 보여줄 수 있지? 이런 생각에 이르니, 또 내 생각은 평범하다 못해 진부하고 지루해진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00일을 넘겼으나 백일 된 아기처럼 몸의 크기도 무게도 두배로 성장하지 못한 브린이는 생각의 깊이가 그냥 거기 제자리에 머물러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에 우울하다 못해 침잠한다.
고래들이 살고 있는 바다에 새우로 살고 있는 느낌이랄까? 딱 그런 느낌이다. 다행인 것은 지금 이곳은 착한 고래들만 사는 곳이라, 싸움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싸움이 일어난다면 분명 새우인 내 등만 터질 것이기에 착한 고래들만 살고 있음에 매일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새우다.
고래가 사는 바다에서 작고 평범한 새우는 고래들 눈에 보일 리가 없다. 작고 평범하지만, 혼자 살 수는 없는 세상이기에 이왕이면 고래와 함께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해 보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고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존재다. 고래가 무심코 하품이라도 한번 해버린다면, 고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저 무심코 생긴 물길 따라 고래밥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작디작은 새우. 그나마,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며 생존 방법을 알려주는 같은 모양새의 새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근데, 내가 잘못 봤다.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같은 종의 새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젓새우(젓갈용 작은 새우)인데, 그들은 대하이다. 그냥 나보다 덩치가 조금 클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나와 또 다른 종의 존재감 있는 커다란 새우다.
(좌) 젓갈 담그기 용으로 주로 쓰이는 젓새우, (우) 구워 먹으면 너무나 맛난 대하-홍삼 스틱만 하다. 출처: 띠리 님의 블로그
그들은 고래들 눈에도 잘 보여서, 먹으려는 의도가 없을 때는 고래들도 그들 옆을 지나갈 때 조심히 지나간다. 고래의 쿨럭이는 기침 한방이면 수포처럼 멀리 흩어져 버리고, 깊은 호흡 한 숨이면 물처럼 쉬이 고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리 쉽디 쉬운 새우는 아니다.
이런 보잘것없이 작은 젓새우의 일상은 고래에게는 아주 가소롭기 짝이 없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일 뿐이고, 대하에게는 아주 가끔 공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일상밖에 되지 않아서 특별하게 꺼내 놓을만한 이야기가 없다. 바닷속에서 생존을 위해 온 몸과 온 힘을 다해 유영하는 젓새우의 몸부림은 대하의 눈에는 별 특별할 것 없이 그냥 호흡할 때 느껴지는 폐의 움직임과 같은 작은 미동으로 보일 뿐이고, 고래의 눈에는 아무런 미동도 없는 정지된 상태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다.
작으니까 그냥 없다고 생각되는 그것. 바닷속을 누비는 고래와 대하의 여유로운 유영을 보며 나도 그렇게 여유롭게 유영하고 싶다고, 가끔은 유영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존재감 있는 그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열심히 등을 폈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며 유영해보지만, 열심히 퍼덕거림이 고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대하 눈에는 그저 숨 쉬고 있는 호흡처럼 보일 뿐 별다르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처럼 젓새우의 유영은 온몸으로 퍼덕거려도 바닷속에서 수포 하나 만들지 못하고, 물살 하나 가르지 못하는 무모한 도전과도 같다. 그럼에도 유영한다. 살기 위해서. 아니, 성장하기 위해서. 비록 대하의 눈과 고래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작은 근육이 느리지만 조금씩이라도 더 자라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을 지라도 서서히 몸집이 커지고 있을지도 몰라서...
킹 블랙 타이거 새우
혹시, 모를 일이다. 미운 오리가 오리가 아닌 백조였던 것처럼 작은 몸체라 젓새우인 줄 알았는 데, 알고 보니 타이거 새우의 새끼였을 지도. 대하가 새삼 부러워할 덩치의 새우가 될 지도. 고래가 먹기 부담스러워할 덩치의 새우가 될 지도.
그러니, 유영을 멈추지 마라. 내가 어떤 새우인지 알 때까지. 혹, 내가 고작 젓새우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멈추지 마라. 돌연변이도 있는 거니까. 내 속의 유전자조차 다 알게 될 때까지 멈추지 마라. 누군가 말했듯이, 간절히 바래서, 온 우주가 내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줄 때까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낼 때까지. 그 것이,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작디작은 평범한 새우가 망망대해 고래들 사이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일 테니...
고래는 먹이로 작은 새우를 좋아하며 정어리·청어·삼치 외에 여러 가지 작은 물고기나 해파리류를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타이거 새우만큼 커지면 고래가 먹이로 부담스러워할 것이라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오로지 저만의 상상이라고 밝히는 바, 과학적인 반박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이웃 작가님이 파엘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고 쓴 글에 감명받아, 저는 저 나름대로 현재 내 상황에 적용하여 내 느낌을 적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