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조식을 든든하게 먹고, 내일 투어 때문에 새벽부터 나가야 하니 조식을 먹을 수 없어서 호텔에 간단한 밀박스를 요청했다. 예전에 묵었던 어느 호텔에서 아침 일찍 체크아웃하는 손님을 위해 조식 대신 간단한 빵과 음료를 준비해 줬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텔 측에서는 내일 새벽에는 밀박스 준비가 어려우니 오늘 조식 뷔페가 끝나기 전에 런치박스에 먹고 싶은 대로 골라서 넣어가라고 한다. 막상 맘껏 싸가라고 하니 담을 게 마땅치 않아서 크루아상과 과일, 우유만 간단히 챙겼다.
오늘은 멜버른 시내를둘러보기로 했다.
첫번째 목적지는 빅토리아 주립도서관. 멜버른은 무료 트램구간이 많아서 트램을 타고 다니면 된다고 듣긴 했는데 어느 구간이 무료이고 어디부터 유료인지 알 수가 없어서(사실 신경쓰는 게 귀찮았다) 우린 일단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머리가 나쁘니 손발이 고생을 한다. 다행히 빅토리아 주립도서관은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무슨 호주까지 와서 도서관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은 도서관 이상의 특별함이 있다. 도서관의 외관부터 너무 웅장한데,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전과 느낌이 비슷하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면 도서관이 아니라 박물관에 입장하는 느낌인데, 도서관의 역사와 관람방법에 대해서 안내해 주시는 분들도 계신다. 안내에 따라 들어가면 도서관의 메인 열람실 La Trobe Reading room이 보인다. 열람실로 들어가는 문이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들어가는 문처럼 완전 고전적으로 생겼는데 놀랍게도 양쪽으로 열리는 자동문이다. 완전 신기하다.
열람실에서는 현지인들과 관광객이 섞인 채로 자유롭게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거나 한다. 서가에 꽂혀있는 책마저도 너무 클래식하고 멋지다. 그중 표지가 제일 멋져 보이는 책을 골라 자리에 앉아 본다. 관광객들은 너도 나도 인증샷을 찍기에 바쁘다. 최대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진짜로 책을 읽는 척을 해야 한다. 아니 진짜로 읽어야 한다. 영어로만 가득한 책을 말이다. 예상대로 이상하고 어색한 사진으로 남았다.
다음 목적지인 세인트 폴 대성당은 시내 중심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대각선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시티에서는 도보나 무료 트램으로 접근이 쉬운 위치에 있다. 전형적인 고딕양식으로 뾰족뾰족 지어져 있는데, 그 화려한 외관과 웅장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유럽의 많은 성당들을 가봤지만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성당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아쉬웠다.
성당 바로 앞에 자리한 플린더스역도 멋진 건축물이었는데, 중세시대의 건축물 같은 플린더스역의 모습과 주변의 현대식 건물들이 묘하게 대조를 이루며 마치 과거와 현대가 교차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외국인들이 서울에 와서 고궁과 빌딩숲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워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야라강 쪽으로 걷다 보니 유명한 그래피티 거리 호시오 레이가 보인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데, 한국인들에게는 흔히 '미사 거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원래는 가볼 생각이 없었는데 걷다 보니 얻어걸린 셈이다. 작은 골목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처럼 다양한 색과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한국인들에게만 유명한 곳은 아닌가 보다. 개인적으로 그래피티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큰 감흥은 없었다.
계속 걷다 보니 피츠로이 가든이 나온다.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넓고, 푸르른 공간이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나무가 어마무시하게 크다. 호주에서는 작은 나무를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도 마을마다 있는 둥구나무가 엄청 크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길가에 있는 웬만한 나무도 그 보다 훨씬 크다. 시원한 나무 그늘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바람이 시원하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플랫화이트가유명하다는 카페 '듁스'에 들러 친구는플랫화이트를시키고, 커피를 못 마시는 나는 아이스 코코아를 주문했다. 진한 커피와 달콤한 코코아가 피로를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근처 한인 마트에 들러 컵라면과 참치마요 덮밥을 사다 먹고,숙소 바로 앞에 있는 공원(어제 캐리어를 끌고 가로질렀던 바로 그 공원)으로 나갔다. 이왕 나온 거 피크닉 기분이라도 내보자 싶어서 내일 아침에 먹으려고 받아둔 빵과 우유를 들고 나왔다. 어제 부러워했던 사람들처럼 나도 나무 그늘 푹신한 잔디 위에 몸을 뉘었다. 물론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참! 호주에 와서 궁금했던 게, 사람들이 잔디만 보면 돗자리도 없이 그냥 막 눕는데 '호주 잔디에는 살인진드기가 없는 건가?'였다. 호주에 사는 한국인에게 얼핏 듣기론 호주에는 살인진드기가 없다고 하는데 확신할 순 없지만 다들 저렇게 아무 데나 눕는 걸 보면 없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속에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참 동안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잠시나마 모든 걱정을 잊고 자연 속에 녹아드는 느낌이 참 좋았다. 이런 게 진정한 힐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