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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셜리 May 07. 2019

고택에서의 하룻밤

배부름이 곧 쉼이니라

작년 연휴에 부산에 갔다가 차가 너~~무 막혀 고생했던 기억 때문에 다신 연휴에 차 막히는 곳은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기에 어디 멀리 갈 엄두는 안 나고 그렇다고 집에 있긴 싫고, 어딜 가긴 가야겠는데...  어딜 갈까? 보성 다향제에 갈까, 무섬마을을 갈까, 기차 타고 경주에 갈까, 차라리 한적함의 끝인 템플스테이를 갈까...
사람 많고 차 막히는 곳은 딱 질색이라, 머릿속으로 고민만 하다가 최대한 가깝고 사람 없는 곳을 에어비앤비에서 찾다가 청원의 고선재로 정하고 바로 전날 급하게 예약을 했다.


마트에서 간단한 먹을거리와 맥주를 사서 국도로 50분 정도를 달리니 고택에 도착했다. 대문에 들어서니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가 제일 먼저 반겨주고 (처음 보는 내게 배까지 보여주고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드는 폼이 집 지키기는 틀린 듯했다. ㅎㅎ), 부엌에 있던 손님이 주인 부부는 교회에 가셨단다. 우리 방이 어딘지 모르니 대청마루에 짐을 올려 놓고 고택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에 강아지 방울이한참을 놀다 보니 주인 부부가 오셨다. 희끗희끗 양갈래 머리를 한 할머니? 아주머니?와 안정환 머리의 할아버지?아저씨?께서 환한 웃음으로 우릴 맞아주셨다. 딱 봐도 뭔가 포스가 느껴진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아버지께서 조형미술로 대학교수를 하다 정년퇴직을 하셨다고 했다. 어쩐지... 예술가의 느낌이 나더라니...

일단 방에 짐을 놓고 쫄면과 꽈배기가 유명하다는 오성당에 가서  점심으로 쫄면을 먹고 꽈배기와 고로케는 포장해달라고 했다. 쫄면은 새콤 달콤한 맛은 좀 덜하고 매콤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먹고 나오면서 보니 사람들 줄이 꽤 길다. 맛집은 맛집인가 보다.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완전 한여름이다. 더운 날엔 역시 아아지... ㅋㅋ 커피를 못 마시는 나지만, 근처 스타벅스에서 큰 맘먹고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해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
꽈배기 한 입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 둘의 궁합이 딱이다! 꽈배기와 아메리카노를 클리어한 후 쉬지도 않고 오징어 땅콩, 포카칩, 포도를 안주 삼아 맥주를 한 캔, 두 캔...ㅎㅎ 방문과 창문을 다 열어놓고 초록초록한 정원을 마주하며 영화를 보니 맥주가 술술 넘어간다. 알딸딸한 술기운에 벌러덩 누워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펴 들었다. 술기운 탓인지 생각보다 책이 술술 잘 읽힌다. 이러다 책 한 권을 다 읽을 기세다.

스타벅스 맥주...ㅋㅋ(야구장에서 마시던 빨대 맥주가 땡겨서 스타벅스 컵에 맥주를 따라 마셨다.)

누워서 한참을 뒹굴거리다 해가 질 무렵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몇 집 안 되는 작은 동네에 새로 지은 집도 많고 예쁜 전원주택 단지도 있는 게, 내가 생각한 시골 동네는 아니라 아쉽긴 하지만 뭐 조용하긴 하니까. 이 작은 동네에 고선재만이 외로운 섬과 같이 한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서 마을을 지키고 있는 느낌이다.

배가 채 꺼지기도 전에 컵라면에 스팸마요덮밥으로 저녁을 먹으려는데 주인 할머니가 "우리 집 김치가 너~~~"여기까지만 듣고 김치가 너무 맛있으니 김치를 주시려나? 성급하게 뒷말을 결론지었으나, 완전 반전! "~~~무 맛없어서 김치는 못 주니까 오이랑 고추장이라도 줄 테니 같이 먹어~" 하신다.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할머니가 주신 오이를 반찬 삼아 컵라면과 참치마요덮밥을 또 배 터지게 먹고 공용화장실이라 다른 손님과 겹칠까봐 일찌감치 대충 씻고 누웠다. 씻고 방에 누우니 TV 생각이 난다. 그동안 집에 들어가면 습관적으로 TV를 틀어놨었는데 TV가 나오지 않으니 뭔가 허전하다. 방에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아주 작고 오래된 TV는 있으나 예상대로 나오지는 않는다. 드라마 볼 시간인데... 오늘은 '자백'이 아주 중요한 타이밍이라 꼭 봐야 되는데 어쩌지? 어찌어찌하다 친구가 TVN 온에어 휴면계정을 살려내고 우린 결국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가 끝나고 딱히 할 일이 없어 책 한 권을 마저 다 읽고 12시 넘어서 자려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안채에 여고동창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일곱 분이 계셨는데, 그분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밤새 끊이질 않는다. 많이 반가우셨겠지. 이해한다~  새벽 1시... 2시... 3시... 잠이 오지 않는다.  낮에 마신 맥주 탓인지 마음이 불안해서인지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 졌다. 화장실이 방에서 채 10미터도 안 떨어져 있고 가는 길에 불도 환히 켜있지만 새벽이라는 시간과 고택이라는 공간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 무섭다... 친구가 깰까 방문 고리를  살짝 열고 엄청 빠른 속도로 뛰어가 최대한 빨리 볼일을 보고 돌아왔다. 방광은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잠은 오지 않는다. 그러다 번뜩 낮에 마셨던 커피가 생각났다. 디카페인이긴 하지만 카페인이 아주 소량 들어있다고 했는데 오늘은 카페인 함량이 더 높았나? 아까 마실 때 카페인이 온몸에 퍼지는 느낌이 난다고 친구한테 말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잠자는 걸 포기하니 새벽 무렵 잠이 든 것 같다. 이제 아주 아주 가끔 마시던 디카페인 커피와도 이별을 해야겠다...

새소리와 함께 날이 밝아오고 한참을 이불속에서 뒤척이다 10시가 넘어서야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어제 그렇게 많이 먹고도 일어나자마자 먹을 생각부터 한다. 냉면 맛집이 근처에 있다 해서 아점으로 냉면을 먹기로 했으나 빈속에 냉면을 먹을 순 없으니 강된장 비빔밥 컵반 하나를 둘이 나눠먹고 가자고 말도 안 되는 합의를 했다. 화장실까지 가기가 귀찮아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강된장 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어제 남긴 고로케까지 먹고 나서야 배불러서 냉면을 어찌 먹냐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다가 짐을 챙겨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나왔다. 차에 짐을 실으려다 보니 차에 송화가루가 노~~~랗게 앉았다. 밖에 계시던 할아버지?얼핏 할머니 연세가 칠십이라 들었으니 할아버지임에 틀림 없을텐데,  음... 아까 할머니는 인상도 푸근하시고 할머니가 잘 어울리는데 왠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라 하기엔 애매하다.  여쭤보진 않았지만 연상연하 커플이실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암튼 젊은 할아버지께서  대충 샤워라도 하고 가야겠다며 차에 물을 시원하게 뿌려주신다. 정말 마지막까지 친절하시다.

고택에서 3분 거리에 있는 냉면집에서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하나씩 시켜 배가 부르네 어쩌네 하면서도 반 이상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은 쉼이 목적이었는데 쉼 보다는 쉼 없이 먹기? 배 터지게 먹기? 가 주였던 것 같다. 그리고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참 좋았지만 개인 화장실이 없다는 점은 참 불편했다. 그래도 하룻밤 정도는 감수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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