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보이는 무리들이 함께 방에서 술을 마신다. 각자 죽음에 관한 경험을 이야기하다 질문의 화살은 소현에게 꽂힌다. 그리고 소현은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모텔에서 자해를 하던 소현이, 엄마 그러니까 제인을 처음 만나게 된 장면으로 영화는 1막을 시작한다.
소현은 가출 청소년이다. 제인은 트랜스젠더다. 제인은 가출 팸을 꾸려 소현과 지수 등을 자식처럼 보살핀다. 자신이 일하는 뉴월드에 데려와 달도 보여주고 언제나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지낸다. 삶을 끝내는 순간에도 아이들을 위한 김밥은 한가득 말아놓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불행 속에 드문드문 얼굴을 보이는 행복 그 ‘개 같은’ 삶을, 그래도 혼자가 아닌 다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소현의 내래이션과, 방바닥에 누워 기댄 무기력한 얼굴을 비스듬히 담은 카메라로 영화의 2막이 시작된다. 새로운 가출 팸으로 보이는 곳에는 병욱이란 아빠가 있다. 살 곳이 없는 아이들은 집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가진 그의 독단적인 행동을 말없이 혹은 동조하며 따른다. 이에 순응할 수 없었던 지수만이 타살과도 같은 자살을 하게 되고, 그녀를 묻는 곳에서 결국 병욱은 아이들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
사회의 소수자들을 위로하는 영화이겠거니 생각하던 관객은 머릿속이 꼬이기 시작한다. 소수자들을 특별한 성향을 지닌 인물로 타자화한 후 그들을 공감한다는 듯 달래주는 기존 영화의 방향성과의 다름을 넘어서, 구성마저 독특함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2막의 가출 팸에서 소현은 1막에서 함께 살았던 지수를 만나게 되는데, 둘이 초면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렇다고 2막이 1막의 과거라기엔 지수가 2막에서 죽음으로써 연결되지 않는다. 1막과 2막은 시간의 흐름이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더구나, 소현이 2막의 가출 팸에서 버려지고 제인의 동료를 찾아가 함께 살게 되면서 머무르게 되는 3막의 공간적 배경은 1막에서 나왔던 제인의 집과 동일하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소현의 내레이션과 엔딩 장면인 뉴월드 무대에서의 제인의 자기고백이 일치하게 되면서, 관객은 인물의 설정에까지 혼란스러움을 갖게 된다. 시간과 공간, 인물의 설정을 약화시킴으로써 영화는 그렇게 사람들의 보편적인 영화 감상 방식의 고리를 가볍게 끊어놓았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구성과 명료하게 분리되는 인물을 배제시킴으로써 메시지는 더욱 강화된다. 나와 타인 혹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그림으로써 누구든 언제나 소현 혹은 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던진다. 그리고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함부로 이해하거나 위로하려 들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다. 위로랍시고 건네받는 몇 마디보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질 때가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혹은 음식이든, 풍경이든 우리는 주변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함께 함으로써 치유를 받는다. ‘3조각만 남은 케이크를 4명의 사람이 한 명을 제하고 나눠먹는’ 사회보다, 불행해도 간간히 찾아오는 행복을 즐기며 다 같이 사는 공동체가 시시해보일지라도 따뜻하다.
병욱의 사회와 대비되는 제인의 사회를 통해 우리는 공생을 배운다. 영화 시작 즈음에 건네는 제인의 “안녕? 돌아왔구나.”란 인사, 마지막의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란 당부는, 결국 꿈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누군가의 꿈과도 같은, 어딘가에 지금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 제인이, 좋아하는 오빠 다시 말해 그리운 사람에게 버림받았던, "어떻게 해야 같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소현, 나아가 그녀가 대신하는 관객에게 진실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불행을 불행히 여기지 말고, 행복을 애쓰지 말고, 그저 함께 살아나가 보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