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옥자> 사랑이 주는 의미

by 진리꽃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 꽃이 되었다.’ 누군가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2.jpg 미자에게 '꽃'이 된 옥자, 영화 <옥자> 스틸 컷



“옥자야!”

극에서 미자는 내내 옥자를 부르고 불렀다. 계곡에서 홍시를 따먹고,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할아버지의 외침에 지름길로 돌아갈 때에도 옥자와 함께 했다. 미국에 간 옥자를 찾으러 곳곳을 누빌 때에도, 생산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갈 때에도 옥자의 이름을 수없이 불렀다. 미자에게 옥자는 가족이었고 꽃이었다.


말은 하지 못해도 눈을 맞추고 체온을 느낄 수 있다면 감정은 교류될 수 있다. 옥자는 잠이 오질 않는 미자를 따뜻한 품 안에 품어주고, 미자는 옥자의 큼지막한 귀를 들어 관객은 모르는 둘만 아는 이야기를 속삭인다. 아픈 주인의 발작 증세를 미리 알아채 주인이 쓰러질 때 다치지 않도록 주인에게 위험을 미리 알리고, 퇴근 후의 주인의 기분을 먼저 파악해 슬며시 옆구리를 파고드는 반려동물의 실제 모습들은 동물과 인간이 서로에게 의미가 된 사례들이다.



4.jpg 책임이 가능한 방식의 책임, 영화 <옥자> 스틸 컷



그렇게 영화는 사람과 동물이 나누는 감정을 통해 사랑이 주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방으로 가득 차 버리게 된 하루가 주는 편안함에 행복감을 느낀다. 이는 상대를, 나아가 사랑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으로 이어진다. 미자는 ‘옥자’란 이름은 사라진 채 그저 ‘부위’의 집합체로 변해버리게 만든 거대 시스템에 저항, 설득 등을 시도하며 맞선다. 그러나 옥자의 이름을 지켜내기 위한 방법이 자본을 철저히 따르는 방식이어야 함을 깨닫고는, 옥자를 순금으로 거래함으로써 자신의 순정에 책임을 다한다. 사랑이 스치는 자리, 책임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따라서, 이를 동물을 먹어선 안 된다는 이념적 이야기로 확대하고 싶진 않다. 인간의 식습관에 육식이 있다는 것을 야만적이라며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사랑하는 반려동물과 처음부터 식용으로 길러지는 동물들 모두의 권리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하게 하는 공간 안에 생명체를 몰아넣고 자본 획득만을 위해 가하는 비윤리적 행태의 잔인성과 탐욕을 자각해야 한다.



1.jpg 영화 <옥자> 메인 포스터



자신이 만든 ‘최초의 사랑 이야기’이자 ‘한쪽에는 애완견을 안은 채 아무렇지 않게 마트에서 포장된 고기를 구입하는 모순적’인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견에 동의한다. 육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 상품으로 생산해내는 과정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 동물을 식용의 하나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경종을 울린다. <옥자>는 사랑하는 가족, 의미 있는 대상과의 감정 교류를 통해 사랑을 하면 따르게 될 무게들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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