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마지막

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아서

by 멍든새

내가 방송작가를 그만두게 된 건 임신 때문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들을 보내던 중 생리불순으로 산부인과를 찾았다. 임신테스트기를 해봤을 때 결과상 음성이었기에 임신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병원에 방문했다. 다이어트를 하면서 거의 10kg 가까이 감량했던 시기라 단순히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다면 생리불순으로 산부인과 가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때 갑자기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이네요. 아기집이 보여요.”라는 말을 듣고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제가 며칠 전에 탈색을 했는데요. 괜찮을까요? 다이어트 약도 먹었어요. 얼마 전에 임신테스트기를 했는데 아니라고 결과가 나왔거든요. 진짜 확실한 건가요? 정말 제가 임신인가요?”

또 신기한 건 그냥 생리불순이라고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던 거다. 너무 초기라 임신테스트기에선 아닌 걸로 나왔을 수 있다고 했다. 덕분에 남들 다 찍는 임신테스트기 인증 사진이 없다.

출퇴근길에 내내 멀미를 했던 것, 유난히 졸렸던 것,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 감정적으로 예민했던 것 모두 호르몬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사실 임신한 걸 알게 되었지만 그만둘 생각까지는 없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애 낳고 잠깐 쉰 다음에 다시 일을 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애정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 책임감 때문이었다. 내 몫을 해내지 못하면 피해를 보는 건 후배들이었다.

나는 우리 팀의 유일한 유부녀 작가이자 첫 임산부였다. 임신을 하면 잠이 늘어난다는 것도, 컨디션이 들쭉날쭉하다는 것도, 출퇴근이 힘들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조차도 몰랐으니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식사 때마다 입덧 때문에 눈치를 봐야 했고 일은 평소 일정대로 하는데 부족한 것처럼 비쳤다.

어느 날은 선배에게 입덧 때문에 출근이 어려울 것 같다, 집에서 일해도 되겠냐고 묻자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동안 몇 년간 함께한 의리가 있는데도 배려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날들이 계속됐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방송작가들은 여자가 많다 보니까 선후배 간에 ‘언니’라고 부르는 문화가 있다. 하지만 진짜 ‘언니’는 아니라는 것, 차라리 기대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실망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에게 나는 수많은 후배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하고 애정을 가진 프로그램이었지만 이후에 내게 연락한 사람은 없었다. 우연히 프로그램의 메인 MC와 출산시기가 엇비슷했고 요란스럽게 그녀의 출산을 축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함께했던 내 선배들은 한, 두 해만 같이 했던 인연이 아니었다. 4, 5년을 함께 했고 마지막 프로그램 기간만 1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된 사람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때 나는 ‘우리’에 속할 수 있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을 땐 나는 나, 너는 너, 공은 공, 사는 사였다.


나 또한 그렇듯 필요에 의해 서로를 찾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일하는 방송국. 그런 생각 때문에 다시 방송작가를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도움이 될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