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인 나, 엄마의 나에게
아주 오랫동안 묵혀둔 이야기다. 엄마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 추억으로 미화되길 기다리며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가 태어난 1962년 3월 30일, 전라북도 순창은 한 집 걸러 한 집이 가족이고 친구였는데 개발이 될 거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골이었다. 1남 4녀 중 막내로 아이가 귀하지 않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는데 집안의 대들보가 되어줄 아들도 아닌데다가 이미 위로 언니만 셋이라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했다. 당시 마흔이 넘은 나이로 노산이었던 외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태어난 아이가 스스로 숨을 멈추길 바라며 엎어놓았는데 그때 우연히 집을 방문했던 고모 덕분에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낮에 남의 집에서 밭을 일구고 밤에는 본인의 밭을 일구며 한 시도 쉬지 못 한 채 일만 하는 사람이었다. 가난하고 여유가 없는 환경에서 그렇게 태어난 엄마는 천덕꾸러기로 집에만 있었다. 집에 먹을 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먹고 싶은 것도 없었고 늘 배고픈 게 당연했고 그러다 보니 늘 왜소한 체구로 크질 않아 모두가 꼬마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엄마가 부모처럼 따랐던 큰언니, 나의 큰 이모는 동네에서 소문난 손재주를 가졌다. 직접 수를 놓아 혼수용 이불을 준비할 정도로 솜씨가 좋았다. 작은 체구에 얌전한 성격 때문에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삯바느질에 꼼꼼한 솜씨를 자랑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바느질을 자주 맡겼기 때문에 네 자매가 마루에 모여 앉아 바느질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엄마의 나이가 10살이 되었을 무렵, 해수 천식을 앓던 외할아버지는 병원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대신 병원비를 아껴서 다락논 네 마지기와 초가집 한 채, 소 한 마리를 여섯 식구에게 남겨주셨는데 장남이었던 큰외삼촌이 술값과 합의금으로 재산을 모두 날렸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때 큰 이모가 여동생들을 불러 모아 함께 먹고 살 궁리를 마련한 덕분에 헤어지지 않고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자매들끼리 모여 병풍의 수를 놓고 언니와 함께 호미 들고 나물을 캐던 시절, 그 시절에 대해 가난했지만 함께여서 행복한 기억이었다.
엄마는 학교를 참 좋아했단다. 매일 동네에서 보고 부딪히는 얼굴들인데 학교에서 보면 새삼스레 의젓해 보이기도 했고 부모님과 비슷한 또래인 선생님들의 얇은 테 안경 너머 관심이 좋았다. 선생님이 되면 그토록 좋아하는 학교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꿈도 가졌다.
머지않아 짧은 추억을 간직한 채 학교를 떠나야 했다. 힘든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아쉬워할 뿐, 그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일을 하고 잠이 드는 것만으로 하루가 버거웠다. 특히 엄마는 외할머니가 아파서 자신의 꿈이나 미래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고모의 소개로 가방공장에 취직되면서 서울로 상경했는데 부담감 때문에 두렵기만 했다. 그럴 땐 의자에 앉아 부품을 만지면서도 학교에서 보던 교과서를 생각했고 귀를 가득 채운 기계음을 들으며 교정에 울려 퍼지는 풍금 소리를 떠올렸다.
일머리가 좋았던 엄마는 공장 일에 금방 적응했다. 하지만 바느질을 잘하던 엄마는, 부품을 꼼꼼하게 조립하던 엄마는 눈이 급속도로 나빠져 공장장의 호출을 몇 번 받더니 얼마 안 돼서 다른 공장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받을 돈을 못 받게 되는 일도 생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서울에서 엄마에게 힘든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퇴근 후에 직장동료들과 함께 가리봉동에서 떡볶이를 먹거나 공장에 위장 취업했던 대학생들에게 공부를 배운 일 등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형부를 통해 소개받아 결혼하게 된 남자가 우리 아빠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