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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17. 2024

왜 자살하면 안 되는 걸까

자살이란 taboo다. 사회적 금기라고도 쓸 수 있겠지만 taboo라는 단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금기는 모두가 조금이라도 동의한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반면 이 taboo라는 단어는 공식적인 느낌보다는 그저 쉬쉬하는 분위기의 느낌을 더 강하게 주기 때문이다.


‘자살’이라는 것은 볼드모트도 아니고 입에 담아서도 안 된다는 듯이 ‘극단적 선택’이란 대체 표현까지 있다. 뭐.... 이제는 그 표현도 쓰면 안 되는 모양이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은 자살이 ‘선택’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고 정부는 생각하는 것 같다. 대신 ‘사망’이나 ‘숨지다’와 같은 표현이 권고되고 있다.

이렇든 저렇든 결국 둘 다 비슷한 이야기다. 자살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최대한 자살을 부추기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결국 자살은 taboo다.


그러나 자살은 왜 ‘나쁜’ 것인가? 지금까지 많은 자살 방지 글을 읽어봤다고 자부하는데, 내가 읽은 것들이 세상에 나온 답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지금껏 들은 답들은 내 검색 능력이 부족한 건지 몰라도 그렇게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내가 찾은 답들은 보통 아래의 카테고리에 포함됐다.


1.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지금 삶을 저버리는 것은 성급한 선택이다.

2. 생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자살은 안된다.

3. 자살은 무조건 나쁜 거다.

4. 남게 되는 사람을 생각해라.      


뒤에서 말하겠지만 미래를 생각하는 만큼 현재의 고통도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고, 생명은 왜 소중한 건지 모호하다. 누구에게 소중하며, 소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언가가 소중하려면 소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 죽어버린다면 그 소중이 다 무슨 소용이지? 3번은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으며 4번은 당사자를 위한 말이 아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슬픔은 누구의 것인가? 떠난 사람? 아니. 누군가 죽었을 때 슬퍼하는 것은 남은 자들이다. 떠난 자들을 더 이상 슬퍼하지 못한다.

남겨질 자들을 존중하라 말하려면 떠날 자들도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 자살이 선택지가 아니라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이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유일한 도피처이자 탈출구였을 것이다. 만약 더 나은 선택지를 제공해주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자살은 나쁜 거고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해 떠나지 말라 강요한다면 어쩔 수 없이 삶에 남은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런 그를 보며 주변인들만이 안심할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을 위한 말했지만 정말 당신을 위한 게 맞았을까. 이해한다 말했지만 이해하려 시도하긴 했던 걸까. 그저 그들 입장에서 생명이 소중했고, 그들 입장에서 자살이 나쁜 것이며 그들 입장에서 남겨질 사람이 되기 싫으니 죽지 말라는 건 아닐까. 솔직히 나는 아직도 자살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보 같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바보는 정말 나인가?


사람들이 왜 자살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안타까워하는지 알고 있다. 자살하는 이들이 사회에서 내몰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교 폭력으로 인해 자살로 몰렸다면 그건 자신의 선택이라기보다는 떠밀린 것에 가깝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안타깝다면 생명이 고귀하다 말하기보다는 그에게 있어 자살보다 나을 선택지를 제공해 주는 게 맞다고 본다. 자살 또한 세상이 선택지가 맞다 아니다 뭐라고 왈가왈가하든 목전에 닥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선택지가 맞다. 죽음이란 당사자에게 가장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하다. 지금껏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분명 수많은 고민 끝에 자살이 더 '나은' 선택지이기에 택했을 것이다.

자살은 당사자에게 나쁘지 않다. 주변인에게 나쁜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죽음이 당사자에게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나에게는 이 태도가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살이 큰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에게 있어, 특히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사회적 문제라는 점이 그들의 선택을 철회할 이유가 되어줄 수는 없다.

사회에 필요하다고 개개인에게 고통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게 무엇이든 taboo취급하고 쉬쉬한다면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할 것이다. 본질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계속 수박 껍데기만 핥아대면 누군가 송곳으로 중앙을 찔러버렸을 때 대책을 마련할 수 없다.


자살을 입에 담아서도 안 될 문제로 취급하며 쉬쉬하는 건 근본적인 도움이나 해결책, 그 무엇도 아니다. 수명도 길지 않은 간단한 회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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