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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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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음수고 죽음은 0

우울증을 동반하는 삶이란 고통 그 자체였다. 현재에는 즐거운 것이 아무것도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은 차단되었으며 과거의 좋은 기억들은 금방 사라질 뿐인 허상이었다. 반복할 힘도 없었을뿐더러 어찌어찌 즐거웠던 기억의 끝자락을 잡고 그를 복원하려 노력해도 더 이상 같은 행위에서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결국 과거는 바꿀 수 없고 현재는 고통스러우며 미래 또한 고통스러울 것이다. 삶이란 게 고통 그 자체였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우울증이 어쨌네 자살이 저쨌네 하는 생각들은 모두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삶 자체가 거대한 고통의 덩어리일 뿐이니 숨을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자살은 하지 말라 말했기 때문이다. 이해는 가지 않지만 모두가 그리 말하는 데는 뭔가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고 마지막 기회를 주듯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람들의 말처럼 자살을 꼭 하지 말아야 하고 삶에 꼭 철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자살이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 관점이 남겨진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삶의 이유와 비슷하게 본능이 관여하는 구간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우리는 슬프다. 또, 사람은 기본적으로 죽기보다는 살고 싶어 한다. 그러니 슬픔의 원인인 '죽음'을 자연히 나쁜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결론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뿐이다. 자살이 나쁜 이유는 본능으로 인한 착각일 뿐인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확신이란 원래 없는 것. 반대의 의견,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의견을 을 확신할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차라리 나를 믿고 싶었다. 내 선택이니 말이다. 자연스럽게 자살에 대한 생각이 커져갔다.       




'삶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가?'

따로 긴긴 논쟁을 할 수 있을 주제이겠지만, 요지는 그게 아니니 간단화를 위한 도구로 잠시 숫자를 빌려오겠다.


죽음은 0

나는 신학적 의미를 배제하고 남는 삶의 이유란 진화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믿는 종교가 없다. 그러니 만약 사후세계가 없다고 가정하고, 죽었을 때 모든 것이 그저 무(無)로 돌아가 버리는 거라면 죽음은 0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망각의 꿈을 꿔본 적 있는가? 죽으면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분명 들어봤을 것이다. 죽음이란 나쁜 것으로 인식되지만 망각의 꿈을 꾼 뒤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그렇게 오래 망각의 꿈을 꾸고 있어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이 영원하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편안하다 말하는 것 또한 후에 우리가 깨어났을 때를 이야기하는 거지만, 모든 게 사라진다면 좋고 나쁜 것 또한 어디 있겠는가? 사후세계가 없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기억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공간일 뿐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 망각의 꿈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죽음은 0의 상태로 보였다.


삶은 음수

반면 고통은 음수다. 어떤 철학에서는 고통이야말로 쾌락으로 가는 길이라거나 뭐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고 나에게 별로 중요한 의견도 아니었다. 내 하루하루는 고통이었기에 삶은 음수였다.


삶이 음수라면 0의 세계로 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 0이 음수보단 높은 곳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살이 분명하게 더 타당한 선택지처럼 보였다. 대체 나는 왜 죽으면 안 되는가? 살아있는 이유는 죽지 않아서일 뿐이었다. 진화일 뿐이었다. 만약 진화를 거스르는 것이,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면 굳이 살아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자살을 택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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