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ic- 카이의 카무플라주 데님 버뮤다팬츠
모리와키 초등학교 5-3반. 도쿄에서 전학 온 아마미야 슈우헤이는 4살 때부터 쳐온 피아노가 특기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도시의 세련된 학생인 슈우헤이는 여학생들에게는 왕자님으로 일부 남학생들에게는 계집애처럼 피아노를 친다며 놀림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을 부추겨 괴롭히기를 일삼는 무리의 대장 일명 호빵맨은 슈우헤이에게 숲에 버려진 피아노를 치고 온다면 친구이자 사나이로 인정해 준다고 담력 테스트를 강요하며 어차피 고장 나 소리가 나지 않으니 대신 남자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신체부위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한다. 이를 본 이찌노세 카이는 슈우헤이가 피아노 치는 법을 알고 있으니 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 얘기해 준다. 그러나 호빵맨이 쳤을 땐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반발하고 숲의 피아노는 자신의 것이라 잘 알고 있다는 카이와 한바탕 몸싸움이 벌어진다.
때마침 들어온 음악교사 아지노 소우스케가 싸움을 진정시키고 바닥에 떨어진 카이의 실내화를 줍다 소년이 피아노 밑에서 숨죽여 우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말없이 피아노에 앉아 <갈색의 작은 병>을 연주하고 종료 후 이제 진정되었으면 집으로 돌아가라 말한다. 곧이어 방금 연주한 곡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카이. 교과서에 실린 적이 없고 아지노가 편곡한 유일한 곡을 1년 전 수업 시간에 한두 번 들려준 것이 전부인데 미세한 부분의 차이를 잡아내는 아이의 행동에 놀라 얘기를 이어가려 하지만 황급히 교실을 떠나는 카이를 바라보며 의문점을 갖게 된다.
남자의 증거를 보이라며 자신을 괴롭히는 호빵맨을 만난다는 생각에 등굣길 발걸음을 멈춘 슈우헤이에게 카이는 숲의 피아노를 치고 오자고 제의한다. 숲 속 한가운데 피아노가 있는 광경에 감탄하며 슈우헤이가 피아노를 치지만 소리는 나지 않아 역시 고장 났다고 말하자 카이가 건반을 두드리니 바로 음을 내는 피아노. 한 번도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던 아이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음색의 연주를 들려준다. 슈우헤이는 호빵맨에게 숲의 피아노를 치고 왔다며 카이가 그 증인이라 하지만 카이는 창부(娼婦)의 자식이라 인간이 아니라서 증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분노한 카이는 호빵맨과 크게 싸운다.
다음날 카이가 결석하자 호빵맨은 슈우헤이를 겁박해 친구들 앞에서 바지를 내리게 해 수치심을 주지만 울면서 달려간 숲에서 피아노 소리를 듣고 위안받는다. 슈우헤이의 집에 초대받은 카이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숲의 피아노가 아닌 다른 피아노를 치게 되는데 가볍고 빠른 손놀림에 흥분을 주체 못 하고 이상하게도 숲의 피아노를 칠 때처럼 아름다운 음색은 나지 않는다. 따발총같이 시끄러운 소리에 찾아온 슈우헤이의 엄마는 아이들의 대화에서 아지노 선생님의 이름을 듣게 되고, 그가 과거에 모든 음대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유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불의의 사고로 연주자로서 생명을 잃고 시골의 음악교사로 살아가는 아지노에게 아들의 개인 지도를 부탁하러 간 슈우헤이의 엄마는 거절당한다. 누구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생각도 제자를 받을 수도 없다는 말에 조율사도 알아채기 힘든 피아노 음계의 이탈을 단번에 알아챈 카이의 실력을 말하며 그가 따로 알려준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 얼마 전 자신의 연주 실수를 세세하게 말하던 아이의 이름을 다른 이를 통해서 다시 듣게 된 아지노는 오직 카이만이 숲의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슈우헤이의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숲으로 향한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숲의 피아노 소리를 카이를 통해 듣게 되자 그는 말했다.
"나와 같이 피아노를 치지 않겠니?"
1998년 연재를 시작해 2015년 완결된 만화 <피아노의 숲 The Perfect World of KAI>. 일본 판매 누계 600만 부를 돌파한 만화가 이시키 마코토의 히트작으로 청정한 시선으로 소년, 소녀의 성장을 그리는 작가의 주특기에 클래식 음악이라는 키워드가 합쳐 저 탄생한 명작이다.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그리면서도 각자의 사정으로 멈춰 있던 어른들의 성장을 함께 이끌어내 빈틈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작중 클라이맥스인 쇼팽 콩쿠르 장면은 실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대회로 개최되는 장소 및 주변 시설에 꼼꼼한 취재와 자료조사를 더해 현장감을 살렸다. 회사의 허락을 받아 피아노 브랜드의 로고를 변형 없이 작품에 그대로 사용하며 클래식 음악 감상의 느낌을 세밀하게 묘사하려고 전문가에게 음악협력을 구한 점을 별도로 기재해 감사함을 전 한 것에서 작가가 만화로 피아노와 클래식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시키 마코토는 1984년 데뷔해 단정하고 귀여운 그림체로 지금도 꾸준히 활동하는 현직 만화가다. 캐릭터들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많이 등장하는 그녀의 만화는 언제나 인물에 대한 다정한 시선이 느껴진다. 초기 작품 <너는 Boogie はなったれ Boogie>를 비롯해 <다시 돌아와! 出直しといで!>, <13일에는 꽃을 장식하고 13日には花を飾って> 등은 일상의 행복과 성장 및 방황 그리고 가족애까지 아우른다. 특히 순박한 시골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데 일가견이 있으며, 제19회 코단샤 만화상을 수상한 <하나다 소년사 花田少年史> 는 그 정수를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다져가며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했다.
여자 레슬링을 소재로 한 <허슬 ハッスル>과 피아니스트를 다룬 <피아노의 숲 ピアノの森> 등의 전문 분야의 이야기도 이시키 마코토의 터치가 더해지면 어렵고 복잡하게 내용을 전개하지 않고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고 촘촘히 그려내 공감하게 만들어 등장인물들을 응원하게 된다. 최신작 <또 다른 피아노의 숲 정돈하는 소리 もうひとつのピアノの森 整う音>는 <피아노의 숲>에 나왔던 무카이 사토루가 주인공으로 존경하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프로 조율사가 되려는 이야기를 담아내 작가가 피아노라는 소재에 가지는 남다른 애정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람의 성장을 정다운 시선으로 그려내는 이시키 마코토의 속 깊은 성정(性情)이 느껴지는 만화 <피아노의 숲>은 1999년 국내 정식 발행 때부터 2016년 신장판이 다시 발매된 현재까지도 책 안에 빠지지 않고 표기되는 문구가 있다.
'본 작품은 국내 실정에 맞게 원작자의 동의를 얻어 내용 일부를 수정하였습니다.'
원작자의 동의를 얻었다고 했지만 내용 일부를 수정한다는 것은 작품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다. 국내 심의 기준에 따라 만화에서 선정성과 폭력성이 짙은 장면을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경우가 있지만 작품에서 작가가 표현하려는 원래 의도를 왜곡할 수도 있어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보이기를 모든 만화가가 바란다. 그러나 <피아노의 숲>은 그림의 형태와 더불어 내용까지 부분적으로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다. 일본에서 나온 원서와 내용을 비교해 보면 선정성과 폭력성을 나타내는 어휘를 대체할 수 없어 문장 자체가 탈바꿈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것은 한 나라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오랜 시간 이어 저온 뿌리 깊은 차별과 멸시의 문화를 한국 독자에게 배경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서 기인했다.
부라쿠민(部落民)은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떠올리게 하는 일본의 불가촉천민을 이르는 전근대 신분제도의 산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왕권을 강화하려 내세운 사농공상의 근본 아래 가장 아래 신분에 있는 농민의 불만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그들보다 더 아래 신분을 만들며 시작된다. 이들은 사회를 구성하는데 꼭 필요하지만 천대(賤待) 받는 더럽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며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당시 국교(國敎)였던 불교의 영향은 식량을 구하기 위한 도축행위도 살생으로 여겨 이를 행하는 사람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취급하고 하는 일에 따라 에타(欌多)와 히닌(非人)이라는 명칭으로 분류해 부르며 노골적인 모욕을 담아 인권을 유린한다.
당시 세계는 대부분의 나라가 신분제도 속에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의 전파와 전쟁을 치르고 산업혁명을 거치며 신분제도는 점점 힘을 잃는다. 우리나라도 신분제도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속에 서양 문물의 수용과 항일운동으로 국가와 개인의 자유 및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서서히 변화된다. 특히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며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등장은 민주주의 이념으로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시대적 개념을 심어주었다. 역사학자들이 국내 신분제도가 없어지는데 결정적 트리거가 됐다고 평가하는 6.25 전쟁의 발발은 긴박한 생사가 오가는 난리 통 앞에 신분 차이로 인한 생명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깨닫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열도(列島) 전체가 전쟁에 휩싸일 정도로 큰 피해를 받은 적이 없었고 섬나라 특유의 폐쇄적인 환경에서 신분제도로 국가의 발전을 도모한 사람들은 불만을 드러내기보다 유지되기를 선택하며 지금까지도 신분제의 영향이 지속되게 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살 수 없는 부라쿠민은 따로 모여 부락을 만들어 산다. 현대사회로 들어와 눈부신 발전으로 동양 최고의 선진국이 된 일본의 경제, 문화, 교육의 혜택은 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아 세월이 흘러도 열악한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건 여전했다. 더 부강한 나라로의 도약을 위해 사회 결속을 다져야 했던 일본 정부는 1969년 '동화정책사업 특별 조치법'을 공포하며 신분제도로 부라쿠민들이 겪었던 차별을 없애고자 노력했지만 뿌리 깊은 신분의 관례를 바꾸지 못했고 현재도 일본 사회 내에서 부라쿠민 출신으로 인한 피해를 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벌어지지만 터부 시 되는 부라쿠민이라는 신분제도의 문제를 작가는 작품에서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부라쿠민 출신의 아이 카이가 사는 '숲의 가장자리'는 별도의 명칭으로 알 수 있듯 일반 마을 사람들과 떨어져 군락을 이뤄 살고 있다. 대대로 유흥과 매춘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 살지 못한다. 내부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개인의 삶을 살 수 없고 숲의 가장자리에 종속되어 자유가 없다.
" '이곳'의 인간이 '이곳'을 위해 돈을 벌어 들이는 건 '이곳'의 규칙이다! "
숲의 가장자리에서 창부로 일하는 카이의 엄마가 다니는 가게의 주인은 이곳에 규칙을 들어 아직 초등학생인 카이에게 손님을 호객하는 삐끼가 돼라 말하고, 피아노를 진지하게 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피아니스트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창부의 자식이자 부라쿠민으로 태어난 카이의 태생에 대한 굴레는 아직 싹이 다 자라나지도 않은 어린이에게 꿈꾸는 행위를 불허하며 보통의 아이로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 카이의 엄마 레이코 역시 숲의 가장자리의 토박이로 이곳을 떠나 산적이 없다. 한 번도 바다에 가본 적 없는 그녀는 15세에 낳은 아들에게 가보지 못한 세계의 대한 동경을 담아 이름을 바다를 뜻하는 *카이(海)로 지었다. 거칠 것 없이 흐르는 바다의 물결처럼 너만은 자유롭게 다른 세상 속으로 나아가길 염원하면서.
*일본어로 '海(바다 해)'의 음독은 카이(かい)로 읽는다.
신분으로 인해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고 살아온 카이는 피아노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영역에서도 일반 학생에 비해 천재성이 과하다며 배척당한다. 일본의 전국 학생 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해 빼어난 연주로 심사위원과 청중의 마음을 사로 잡지만, 오랫동안 관습으로 획일화된 정확한 연주에 대한 기준을 들며 예선에서 떨어뜨린다. 세상에 한번 나오기 힘든 재능을 가진 것을 심사위원 모두가 알지만 전통적인 대회 기준을 파괴하는 전례를 만들 수 없다는 이유다. 국내 피아노 콩쿠르의 기준에 카이의 능력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로 심사 범위를 초월하는 뛰어남을 가진 소년의 존재는 그 능력을 키우고 함께 가기엔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존재인 것이다.
콩쿠르의 결과에 상관없이 카이를 출전시킨 아지노는 청중 앞에서 독보적인 개성으로 음색을 내는 연주와 예선 불합격 통보를 보며 일본의 좁은 기준으로는 아이의 꿈을 제대로 키워 줄 수 없다고 생각해 세계 무대로 데리고 나갈 것을 결의한다. 불가항력으로 부라쿠민이자 창부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국내 피아노 업계에선 환영받지 못하는 삶이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이다.
아지노는 피아노 연주에 자신과 같은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난 카이가 숲의 가장자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어린 나이부터 겪어온 험난한 일들을 가까이서 보았다. 본격적으로 재능을 키우려 초등학교 졸업 후 음악과가 있는 중학교를 지원하려 했을 때 번번이 거부당하고 입학 승인이 되어도 까다로운 조건을 걸어 차별을 두는 건 여전했다. 태생이 삶을 옭아매는 부자유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카이에게 그는 음악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사는 기쁨을 알게 하고 본인이 곁에 있는 동안 온 힘을 다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너에게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르친다. 편견이 닿지 않는 세계 무대라는 넓은 곳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 더 좋은 환경과 기회가 제자 앞에 놓이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랐다.
작가는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난 소년이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사람들이 향유(享有)했던 클래식 음악이라는 분야에서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천재성을 가지고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과정을 그리며 부라쿠민이라는 신분제도의 그늘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유롭게 꿈을 찾아 재능을 키우며 살아갈 수 있음을 얘기한다.
클래식 음악의 유래가 신을 향한 사랑과 찬미를 노래하는 종교 음악에 뿌리를 둔 것에 옛날엔 왕가와 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었던 호사스러운 문화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디지털 음원으로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들을 수 있게 됐다. 클래식 음악 대중화를 만든 기술의 발달처럼 역사 속에 뿌리 깊게 내린 신분 인식도 사회의 발전과 맞춰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은 카이의 피아노 소리가 모든 것을 공평하게 아우르는 위대한 자연이 있는 곳으로 청중을 인도하는 것에서 전해진다.
카이의 피아노 소리에서 숲의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것은 집 뒤편과 숲이 연결된 형태로 살았던 영향이다. 일반 사회 속에 섞여 살지 못하고 배척당하던 부라쿠민들에게 자연은 '숲의 가장자리'라는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어느 날 숲 속에 버려진 피아노에게도 편안히 머물 곳이 된다.
대자연은 세상에서 버려진 모든 것들을 너그럽게 품어 다시 세상 밖으로 이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벌레, 동식물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이 다양성의 산실에서는 생김새로 인한 크기 차이나 힘의 강약은 존재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포용한다. 일반 세계에서 버려진 부라쿠민의 아이 카이와 사고로 연주자로서 생명을 잃어 살아도 죽은 거나 다름없던 아지노는 자연의 조화(造化)에 이끌려 숲의 피아노를 매개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며 같이 밝은 세계로 나아간다.
피아노와 카이를 만나게 한 나무는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가 합쳐 저 하나가 된 특별한 형태로 이것은 각기 다른 존재인 인간과 악기가 피아노의 선율로서 하나 됨을 뜻하며 동시에 부라쿠민의 신분을 가진 사람도 일반 사회 속에서 융화되어 함께 살 수 있음 내포한다.
세 살 때 2층 방에서 떨어져 죽은 줄 알았던 카이는 나무에 걸려 산다. 그 나무 옆에 있던 피아노를 발견하며 장난감이자 친구가 되었고 어린 엄마 레이코를 도와 소년을 키워낸다. 과거 천재 피아니스트 아지노의 전용으로 제작된 피아노는 영광의 음을 내며 찬란한 시간을 살지만 그가 연주자의 생명을 잃은 뒤 헐값에 카바레 주인에게 팔린다. 그러나 무거운 특수 건반으로 만들어져 다른 사람은 쉽게 치지 못해 쓸모가 없어 숲에 버려진다. 연주자의 손길을 받지 못해 악기로서 생명력을 잃게 된 피아노는 카이와 만나 매일 어루만져지며 다시 소리를 내게 되었고 잃었던 생명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숲의 피아노 소리를 오직 카이만이 낼 수 있는 것은 각각이 숲을 통해 제2의 생명 얻어 한 배에서 잉태된 유대로 소리로서 공명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으로, 버려진 피아노의 회복은 과거 피아노와 일심동체였던 연주자 아지노가 카이라는 원석을 키워내는 지도자로 다시 살 게 하는 힘을 불러일으킨다.
카이의 숲이 키운 아이라는 정체성은 생활습관에서 드러난다. 학교에서 급식으로 나온 고기가 먹기 싫어 울면서 거부하는 것은 나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아이가 숲과 유대하는 관계로 보이는 본능적 거부 반응으로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평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로 신발을 신는 카이는 학교에서도 스스럼없이 맨발 상태를 자주 보이며 숲의 피아노를 칠 때에도 맨발로 페달을 밟는다. 이것은 나무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땅 속에 뿌리를 내려 영양을 공급받는 것처럼 인간 나무인 카이도 맨발로 숲의 지면과 접촉해 흙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이렇게 전달된 에너지는 놀라운 생명력이 느껴지는 카이 연주의 원천으로 야생의 피아노를 치며 피아니스트의 꿈을 향해 달려갔다.
자연과의 연결을 나타내는 상징은 카이가 입은 옷차림에서 확연히 보인다. 방과 후 술집 주방에서 일하며 거칠고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 카이는 데님이라는 튼튼한 원단에 카무플라주 패턴이 프린팅된 '카무플라주 데님 버뮤다팬츠'를 입는다. 작중 내용 전개와 단독 일러스트는 물론 단행본 1권과 2권의 표지로도 그려져 그 중요성을 느끼게 한다. 허리밴드를 포함한 옷의 옆길이가 무릎 위로 오는 버뮤다팬츠(Bermudapants)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대서양에 있는 버뮤다제도의 원주민이 입은 복장을 보고 영국인이 처음 만들었다는 유래가 있는 옷으로 숲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놀고 피아노를 치는 카이에게 편안하고 딱 맞는 기장을 가진 바지다. 여기에 입혀진 *카무플라주 패턴은 나뭇잎의 초록과 나무껍질의 갈색이 한데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표현했다. 더불어 상의에 입은 티셔츠와 슬리브리스에 태양을 형상화한 그림이 자주 나오는 것은 햇빛이 나무의 생장에 꼭 필요한 것처럼 나무 소년 카이의 인생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함께 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리저리 뒤엉켜 보이지만 그 안에서 어울림의 질서가 만들어지는 카무플라주 패턴은 여러 개의 면이 뭉친 느낌이 도드라진 기본형과 사각의 픽셀(Pixel)로 면을 분할해서 표현한 디지털 카무플라주가 대표적이다. 작품에서 카이는 디지털 카무플라주 패턴이 상의와 하의에 번갈아 나타나며 숲과의 유대를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변장과 위장의 뜻을 가진 이 무늬는 카이가 미래에 아르바이트가 금지인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릿광대와 마리아라는 여성으로 자유로운 변신에 능한 사람이 된다는 복선을 가지고 있다.
*카무플라주 프린트(camouflageprint)- 잎사귀와 그물의 초록과 밤색이 어우러진, 위장을 위한 문양. 자연주의와 밀리터리 룩의 재현으로 캐주얼 룩에 많이 이용된다./ 국어사전
청소년기의 카이는 버뮤다팬츠에서 길어진 기장의 '카무플라주 데님 조거 팬츠'를 입는다. 초등학생 때 보다 커진 신체에 16살로 지학원 고교 2학년에 재학 중 톱클래스의 성적을 유지하면서 학교 몰래 두 곳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기동성 있게 움직이려고 오토바이를 타는 그에게 체온 유지와 다리 보호로 활동성을 극대화한 스타일이다. 이때부터 등장하는 상의는 양팔에 지그재그로 들어간 *컷아웃(cutout) 디테일이 있는 티셔츠로 색상은 총 3가지로 나뉘지만 디자인은 고정된 형태다. 단행본 17권의 표지로도 그려지며 존재감을 확인시킨 이 옷은 나무껍질 표면에 줄처럼 깊게 파인 골을 나타낸 것으로 커팅 된 부분으로 피부를 드러내며 보다 직접적인 숨으로 자연의 공기가 드나들어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카무플라주 데님 조거 팬츠와 같이 이야기의 결말까지 동행하는 옷이며 카이가 숲의 아이로서 가진 유대가 성인이 되어서도 끊기지 않고 이어질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컷아웃 (cutout)- 디자인 의도에 따라 옷의 일부분을 잘라 내는 것.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국어사전
숲이 키운 아이 카이의 여정은 쇼팽 콩쿠르에 출전하며 입은 연주복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아지노 선생님이 과거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하며 빛나던 전성기를 만들어낸 시간을 간직한 무대의상과 구두를 물려받아 이를 통해 그의 경험과 정신이 계승된다. 수선 과정을 거쳐 카이의 몸에 맞게 사이즈와 스타일이 재조정되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연미복과 턱시도로 전통적인 격식을 가진 남성 피아니스트 대다수가 입는 무대 의상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입는 정장에 가까운 형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옷에 맞춰 보타이 대신 넥타이를 맨다. 독보적인 천재성과 실력을 가진 카이라는 신성 피아니스트가 세계 무대에서 피아노 연주로 주는 충격과 감동을 신선한 파격을 반영한 연주복으로 나타냈다.
단행본 21권의 표지와 작품 안에서도 연주복을 입었을 때 유독 강조된 카이의 뒷모습은 의자에 앉아 연주할 때를 위한 작가의 의도된 연출이다. 뒤판 허리 밑에 있는 사이드 슬릿(트임)이 특징으로 의자에 앉으면 밑단이 세 방향으로 갈라져 나무뿌리를 연상하게 만들어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무대라는 숲에 살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카이라는 소년이 성장하는 시기와 이야기의 과정에 맞춰 입는 옷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무가 땅속에서 뿌리를 사방으로 펼친 모습을 형상화한 연주복을 만든 만화가 이시키 마코토에게 나는 감탄하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이토록 짜임새 있고 아름다운 설정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과 캐릭터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외면한 사회 문제를 주제로 다루면서도 만화적 재미는 물론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담아낸 작가의 뜻깊은 아이디어와 기획력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태어난 소년의 꿈은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밝은 세상의 중심에서 삶의 튼튼한 뿌리를 내리며 완성되었다.
<피아노의 숲>의 영문 부제 'The Perfect World of KAI (완벽한 세계의 카이)'는 세속적인 기준에는 가진 것 없이 초라하고 비참한 태생을 가진 소년이지만 생명으로 태어난 그 자체로서 완벽한 세계를 구축한 존재임을 말한다. 숲의 가장자리 출신이자 창부의 아들로 태어나 차별과 멸시 속에 사는 것이 익숙하며 자유가 없는 삶에 카이는 무엇이 되기 위해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이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숲의 피아노를 시작으로 만나게 된 좋은 사람들과 깊이 몰입된 연주를 하며 이미 자신의 내면은 모든 것을 이룰 힘이 깃들여 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피아노는 카이의 삶에 긴밀히 연결되어 인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같이했다. 자연에서 만난 가족이자 친구인 숲의 피아노, 최초의 피아노 선생님이 마련해 준 레슨실의 업라이트 피아노, 처음 나간 콩쿠르의 그랜드 피아노, 아크릴 수지로 만들어져 투명한 악기점의 피아노, 폐업한 재즈바 건물 안에 피아노, 폴란드의 카페에서 만난 플레옐 피아노, 음악학교 강당에 서로 마주 본 두대의 그랜드 피아노. 이 모든 피아노들을 연주하며 카이는 솔직한 감정과 나아갈 방향을 음악의 선율을 통해서 느낀다. 건반을 누르면 바로 소리를 낼 수 있어 다루기 쉽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색을 갖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악기인 피아노는 같은 악보라도 피아니스트의 곡 해석에 따라 서로 다른 감동과 천차만별의 소리를 낸다. 이것은 연주자 개인의 고뇌와 인생관이 음에 실리기 때문이며 역경은 너의 후원자가 되었다는 아지노 선생님의 말처럼 카이는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켜 심금을 울리는 나만의 음을 만들 수 있었다.
독주회로 홀로 돋보이거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에서도 수많은 악기들과 뛰어난 앙상블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피아노는 흰건반과 검은건반을 합쳐 총 88개로 구성된다. 그 숫자를 수평으로 눕히면 '무한대' 모양으로 무려 두 개의 무한대가 지탱하는 피아노는 다양한 음계와 음표를 표현할 수 있는 포괄적 포용의 악기다. 그 소리의 선율은 연주자의 삶이 멈춰 있을 때에도 보이지 않게 순환하며 음(音)의 힘을 믿는 자에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빛으로 언제나 삶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마음을 움직이는 무한한 소리는 내면에 잠든 힘을 두드리며 칠흑 같은 어둠에 잠식된 상태에서 조차 거미줄 같이 가늘고 여린 희망의 줄기가 내려앉게 했다. 지금 카이의 세계는 피아노의 선율이 만든 밝은 세상에 대한 동경과 치유를 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어두운 세계가 붙잡고 있던 소년을 빛의 세계로 데려가겠다는 아지노의 결심은 카이를 차별과 멸시가 닿지 않는 밝은 세상으로 이끌었고, 스승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은 카이는 교통사고로 다친 아지노의 왼손을 회복시키게 도와 다시 피아니스트로서 살 수 있는 제2의 인생을 선사했다. 타인을 위하는 선한 마음이 서로에게 닿는 순환 속에 어떠한 고통도 회복됨을 알려준 숲의 피아노가 인도한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인간의 행복을 고양 시킨 피아노 소리는 삶의 고난 앞에 찾아 헤매는 희망처럼 보이지 않지만, 음(音)의 파동이 한 번이라도 마음에 스며든 적이 있다면 빛의 한가운데 꺼지지 않는 외침으로 퍼지며 마음에 유효한 힘이 됨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