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은 더 앞장서서 싸우라는 조직의 뜻이다.
더 큰 책임과 스트레스를 떠안은 것에 대한 대가로 처자식에게 가져갈 양식을 더 많이 준다.
희생에 대한 대가인 것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몸과 마음이 소모되는 정도가 더 심해짐을 느낀다.
심신을 더 갈아 넣어 회사를 위해 더 큰 잉여를 토해내도록 요구받는다.
자신의 역량의 여유가 있는 범위 내에서 승진 욕심을 내야 한다.
윤석철 교수는 《삶의 정도》에서 "'허'를 채우고 싶어 하는 인간의 충동을 욕심(慾心, desire)이라 부르고, '허'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겸허(謙虛, modesty)라고 부르면, 거의 모든 사람은 욕심이 겸허에 비해 강하기 때문에 계속 승진을 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큰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다 소진되었을 때, 즉 '허'가 없어졌을 때 승진을 멈추게 된다."라고 했다. 노자의 "그릇이 가득 차면 더 이상 그릇 노릇을 못한다"라는 노자의 말을 인용하여 조직에서 '무능'의 수준까지 승진하려 한다고 한다.
'피터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대개 직급이 낮은 단계에서부터 잘했던 사람이 승진한다. 하지만 승진을 거듭할수록 능력이 고갈되는 위치까지 올라간다. 이때 외부에서 보면 무능한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역설이다.
실력 없이 권력과의 공생관계에 의한 승진이 되었다면 자신이나 조직이나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승진을 거듭할수록 채워야 할 그릇의 크기가 더 커진다.
조직에 있는 동안은 그 그릇의 크기에 걸맞은 직위, 복지, 인정, 명예라는 밥을 담아 먹는다.
조직을 떠나면 이미 커져버린 빈 그릇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려야 한다.
그릇이 너무 커져버린 탓에 쉽게 뭔가를 담기도 어렵다.
임원까지 하신 분이 왜 이런 일을 하시려 하느냐며 정중히 거절한다.
쓸데없이 커져버린 빈 그릇에 길들여진 버릇은 쉽사리 고치기도 어렵다.
비서실에서 알아서 해주던 KTX열차표 하나도 스스로 예매하지 못하는 무능 아닌 무능함에 화가 난다.
내가 원래 갖고 있었던 적당한 크기의 그릇은 어디 뒀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게 필요한 것은 소박한 허기를 채우기에 충분한 작은 그릇에 불과한 것을....
겸허에 비해 욕심이 과했던 탓이다.
<사진:박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