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핑마스크도 못하는 애한테 전시장 통 디자인이라니

건축학과지만 설계는 안 할 거예요 (영화 리뷰 포함) - 9

by 푸른


갤러리에서의 일은 쉬운 듯 어려웠다. 그림들을 포장하고, 걸고, 수평을 맞추고, 공간을 만들고.

그런 것들을 쉬웠다. 단순히 조심성 있게, 몸을 쓰면 되는 일이었다. 넓은 공간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그림을 들고 다녔다. 옆에서 설치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내가 직접 그림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맡은 직책은 디자이너였다. 그렇게, 출근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큰 난관에 봉착한다.


사실 난 건축학과를 다니면서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패널을 만들 때에도 남들보다 시각적으로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프로그램과 툴을 이용하여 만든 게 다였다. 그렇기에, 결과물 역시 딱 그 정도였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그렇다고 설계를 잘하지도 않았던 나의 패널은 학부생 내내 눈에 띈 적이 없다.


건축학과라는 곳을 다니면서 내가 내내 느낀 기분은, 이거였다.

‘나는 이렇게도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았구나.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구나.’

그런 생각들로 자존감이 낮아지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패널을 남들에게 내보일 때마다 자신감이 떨어졌고, 그럴 때마다 내가 가진 자존심과 자존감은 함께 떨어지기만 했다.


성인이 되어가면서 대학을 다니면서,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 같다. 그런 생각으로 나의 대학생 시절이 끝났다.


당연히 이런 학부생활을 보낸 나로서는, 컴퓨터 역시 잘할 리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첫 디자인이 주어졌다.


‘ㅇㅇ씨! 이 작가님이 어디서 전시할 건데, 이 전시 키비주얼이랑 전시장 시트자 전부 디자인 시안 만들어주세요.’


막막했다. 디자이너로 취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하는 것을 못하다니. 일러스트레이터에서 클리핑 마스크(*원하는 영역 안에, 원하는 영역을 씌우는 기능인데, 아마 조금이라도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해 접해본 적이 있다면, 기본 중의 기본인 기능이다.)도 못하던 내가 이렇게 큰 전시장 디자인이라니.


세리프와 산세리프조차 모르는 내가 만든 첫 디자인은, 그야말로 별로였다. 폰트도 뭘 써야 할지 몰랐고, 기본적인 배경색을 고르는 것부터, 배치와 쉐잎을 쓰는 것까지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대표와 작가 그리고 내가 있는 단체 채팅방의 알림이 울릴 때마다 두근거렸다.

피드백을 받는 것이 두려웠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완성한 첫 전시장의 디자인은 설치되는 것조차 보지 못하고, 얼렁뚱땅 마무리된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2005)


연출 ㅣ 미키 사토시

출연 ㅣ 우에노 주리, 아오이 유우 등


‘평범하게 사는 게 잠복이지.’


미루고 미루다 이 영화를 튼다. 몇 년 전부터 봐야지 하고 아껴두다가 잊었다. 심심한 주말 밤에 이 영화를 재생한 이유는, 포스터나 썸네일만 봐도 코미디 일 것 같아서다. 말 그대로 생각 없이 웃긴 영화를 보고 싶었다.

실제로 영화를 보는 내내 웃는다. 일본 특유의 이해되지 않는 과한 설정과 엉뚱한 대화들이 웃기다. 소리 내서 웃었다. 마냥 해맑은 영화인 것 같다가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점에서 좋다.


‘어릴 땐 내가 쿠자쿠(아오이 유우)처럼 될 거라 믿었고, 쿠자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나는 스즈메(우에노 주리)인 걸 깨닫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어중간하고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유별나게 눈에 띄지 않아도 어중간하면 어중간한 대로, 평범하면 평범한 대로. 그렇게 살아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영화. 때론 평범함이 가장 특별한 것일 수도 있음을 말해주는 영화다.’


때로 평범한 것이 슬퍼진다면 이영화를 다시 꺼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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