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과지만 설계는 안 할 거예요. (영화 리뷰 포함)- 10화
정말이지 디자인이라는 게 고통스러웠다. 우리 집은 대대손손 예술인 DNA라고는 없는 집안이었다. 미술적인 것은 특히 더더욱.
어릴 적부터 미술학원이나 음악관련된 학원들을 여러 군데 다녔지만, 재능이 영 없었다. 특히 미술적인 부분에선 전혀.
건축학과에 들어오고 그림을 그릴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포기에 포기를 하게 되었다. 내 손은 정말 말 그대로 똥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디자인 적으로 뭐가 좋고 예쁜지를 구분하는 눈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 3개월은 회사에서 업무가 들어올 때마다 두근거렸다. 두려웠다. 내가 못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들키는 것 같았고, 그것들을 온 세상에서 비웃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 부끄러웠다.
대표님은 왜 나를 디자이너로 뽑으신 걸까. 도대체 왜 이렇게 못하는 애한테 큰 일을 맡기시는지. 진짜 내가 만든 디자인을 그대로 설치해도 되나…? 하는 생각들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색하고 어설픈 디자인을 내보일 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직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 디자인에서 이건 이렇게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저건 무슨 색이 더 나을 것 같다 하는 그런 작은 조언들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점차 부족했던 디자인들을 메꿔갔다.
휘몰아치는 전시 디스플레이 외근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들. 입사한 지, 두 달째. 또 엄청나게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10월에 부산에서 있는 전시였다. 전시 자체가 크다기보단, 해야 할 디자인 양이 엄청났다. 전시장 모든 벽과, 전시 관련 서문, 다이어그램. 그리고 배너, 포스터, 현수막, 키비주얼 등등. 엄청난 양의 디자인을 혼자 해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디자인을 할 사람이 없었다. 대표도 디자인을 할 줄은 알지만, 거의 대부분은 내가 해결해야 하는 업무였다. 부족한 디자인 실력과 툴을 다루는 실력. 그리고 발주하는 파일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초보자에게 그런 큰 일은 암담했다.
며칠 내내 야근을 하며, 머리를 싸맸다. 모르는 툴들은 유튜브를 찾아가며 배웠다. 비슷한 디자인 레퍼런스들을 하루 종일 찾아다니기도 했으며, 어떻게 하면 저런 느낌을 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매일매일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을 배워야 했다. 그렇게 빨리 습득해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툴과 효과, 기능들은 디자인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배워나갔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디자인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뽑아냈다.
사람이 극한의 상황이거나 바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매일이었다. 얼렁뚱땅 휘몰아치듯 완성한 그 전시는, 2024년 10월의 가을. 하루에 18시간씩, 꼬박 3일 반나절을 설치 후, 막을 내렸다.
그리고 더위가 막 떠나간 그 10월의 가을. 두렵기만 했던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 즐겁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썸머 필름을 타고! (2020)
연출 | 마츠모토 소우시
출연 | 이토 마리카, 카네코 다이치 등
얼렁뚱땅 영화를 만드는 고등학생들. 하지만 얼렁 뚱땅이라고 넘겨 버리기엔 맨발 감독의 눈은 어딘가 진지하다. 저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에 여름을 바치는 일. 그 에너지로, 여름의 열기보다 더 넘쳐나게 시간을 보내는 일. 부럽기만 했다. 여름 방학. 그들은 자신들만의 사무라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서툴고, 엉망진창이지만,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도전이 너무나 부럽고 대단한 영화.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고 싶다는 열망을 일으키게 하는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는 여름과의 작별을 더 아쉽게 만들면서도 다음 여름의 그들의 새 영화를 기다리게 하는 작품이다. 얼른 다음 여름이 되어, 맨발, 킥보드, 블루 하와이의 새 영화를 만나고 싶다. 맨발의 영화가 미래의 린타로에게 닿는 시간까지. 린타로가 맨발 감독의 영화를 꼭 지켜내는 날까지, 나는 그들의 여름을 사랑하고 싶다.
무언가 열심히 할 이유와 열정을 잃고 주저앉아버렸다면, 이 영화의 필름을 돌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