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설계가 아닌 또 다른 두번째 분야로

건축학과지만 설계는 안 할 거예요. - 8화

by 푸른

*이어지는 형식의 글이다 보니 이전의 글을 읽은 후, 이번 화를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https://brunch.co.kr/@blue-scene/15


주변에서 아직도 설계를 하지 않는 것을 후회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대답에는 100% 진심이 담겨있다.


퇴사를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늘어지게 자고 나서, 해가 저물 때쯤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백수는 행복하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는 꼴이다. 방황하며 캄캄한 밤을 지새우고, 현실을 잊으려는 듯 잠에 들었다. 자고 또 자고 그러다가 하루가 지루해질 때쯤 걱정과 불안이 한 번에 몰려온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 문득 떠오른 건 이전부터 생각해 왔던 분야였다. 설계는 못하지만 건축의 모든 프로세스 중 내가 가장 자신 있던 거.


바로 기획과 아이디어였다. 건축의 가장 초기 단계에선 컨셉이라는 것을 정하는 단계가 있다. 주변 사이트에 대한 조사와 재해석이 끝나면 그 위에 올릴 건물의 이미지를 시작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정하고, 토대가 되는 인상을 정한다. 이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하며, 건물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첫 단계가 되기도 하다.


글을 쓰고, 여러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건물에도 이야기를 담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자신 있었던 아이디어 싸움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이것저것 재미난 요소들을 가져와 건물이 담을 이야기와 앞으로 건물이 갖게 될 이미지를 만드는,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한 이유로 설계가 아닌, 건축기획이나 공간기획의 분야로 눈을 돌리기로 했다.


처음엔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수정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도면과 3d렌더 이미지 등 설계의 결과물만 가득했던 내 포트폴리오를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생각했다. 그러던 중 공간기획뿐만 아니라, 전시기획, 무대기획 등의 분야도 함께 둘러보았다. 취업을 하는 것 자체가 힘든 요즘, 기획이라는 좁은 분야에 속하는 회사도 별로 없었다.


그저 답이 없는 나의 설계 포트폴리오를 바라보면 도면을 하나씩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취미로 주변 지인들을 위해 만들었던 포스터나 로고 등을 담고 그 디자인 속에 있는 아이디어와 초기 구성단계에 대한 이야기를 넣었다. 이 과정을 거치다 보니 시각디자인이나 VMD 직종의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대학교 재학 당시 건축기획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그 수업에서 팝업 전시장 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오래된 대지의 맥락과 이야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해서, 이를 바탕으로 아카이빙이 가능한 조명/퍼니처 팝업 전시장을 만들었었다. 대학생때 했던 수많은 프로젝트 중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이를 포트폴리오에 넣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나만의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때론 컴컴하고 좁은 자취방에서 홀로, 때론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가득한 시끌벅적한 스타벅스 한켠에서. 주변에 시각디자인이나 VMD를 전공한 친구는 없었고, 당연히 그들의 포트폴리오를 볼 기회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나’대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길을 갔으며, 그 길이 맞는지 틀렸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막막했다.


책을 읽었다. 답이 없는 현실을 마주 할 땐 책이 도움이 된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당장 내가 문제가 되는 분야를 책으로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다. 디자인 관련 책을 봤으며,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줄여줄 삶의 방식을 다룬 문장들을 가까이했다. 매주 도서관에서 몇 권의 책을 빌렸다. 그저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꼬박 혼자 24시간씩을 보내니, 무기력을 이겨내는 법을 배웠으며, 혼자 일어서는 근육을 다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과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이는 삶을 대하는 방식을 조금씩 달라지게 했다.


그렇게 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6개월의 백수생활을 마치고, 초여름 7월의 어느 날. 전시 기획을 바탕으로 일하는 한 갤러리에 취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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