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안 하면 뭐 먹고 살 거예요?

건축학과지만 설계는 안 할 거예요 -6화

by 푸른

*이어지는 형식의 글이다 보니 이전의 글을 읽은 후, 이번 화를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https://brunch.co.kr/@blue-scene/15


나의 퇴사 통보는 생각보다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어느 커뮤니티 썰에서만 볼 법한 방식으로 퇴사를 했다. 정말 요즘 MZ처럼말이다. 사직서 없이는 퇴직처리가 안된다는 말에 사직서를 퀵으로 보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엔 정말 회사 상사의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거기다가 갑자기 내가 없어져서 큰코다쳐봐라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물론 회사 입장에선 내가 없어진다고 해서 큰 타격은 없을 것임을 안다.)


말도 안 되게 사적인 것으로 화를 내고, 내 생각과 성격까지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곳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회생활을 처음 해 봐서, 요즘 애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끈기 없이 빨리 포기해 버린다는 이런 말을 듣기 싫었다. 그래서 막상 퇴사를 하니 아무에게도 알릴 수가 없었다. 어른들은 나를 책임감 부족한 가벼운 사람으로 볼 것만 같았고, 빠르게 취업했다며 부러워하고 축하해 준 친구들에게 괜히 부끄러웠다.


퇴사를 하고 처음엔, 다음 날 눈을 뜨면 회사를 안 가도 되는 것이 좋았고, 두 번째로는 나를 힘들게 했던 어른들을 다시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나의 짧고, 미숙한 첫 사회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그 사이 5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고, 졸업은 아직이었다.


시간이 생기자 과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그렇게 설계를 좋아하지도 않아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교수님과 친구들은 내가 계속 직장에 다니며 과제를 하는 줄 알았다.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있었고, 최종 마감이 2주 남은 시점이라 2주만 잘 버티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12월 초, 퇴사를 한 직후, 졸업 심사가 있어서 다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내려가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회사에 가기 싫다고 엄마한테 징징대던 몇 주전의 모습이 선 했다. 내가 다 큰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그런 일을 겪으니, 나는 아직 너무나도 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이런 상황을 견디면서 회사를 잘만 다니는데,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너무 나약한가.'


졸업 심사. 교수님들 여러 명이서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를 보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의 교수님은 내가 이미 건축 매거진에 취업한 사실을 알았다. 그 회사가 어딘지도 다 알았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회사에 대한 질문이 나에게 돌아왔다.


'언제부터 설계 말고 그쪽으로 갈려고 생각했어? 왜? 뭐 때문에?'

'그래 네가 설계성적 말고 다른 건 잘했지.'

'너는 내년에 한번 취업 시즌에 후배들한테 조언해 주러 한 번 와야겠다.'

'일은 어때? 벌써 기사도 쓰니? 웹사이트에 이름 올라왔던데?'


여러 질문에 대답을 하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눈하나 깜짝 안 하고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지. 그날 하루종일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최종 마감날 몇몇 교수님들께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여러 생각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물론 아직도 그런 생각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백수가 된 나는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들을 보며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나도 그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지금 저 사람들처럼 출근길/ 퇴근길을 걷고 있겠지?'


백수가 되고 나서 12월은 학교 최종 과제에 몰두해야 했다. 그래서 조금 괜찮았다. 그동안 회사 때문에 뒤쳐진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최종 제출물에만 집중을 하니, 퇴사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회사를 내려두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과 그대로인 학생의 모습이었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12월은 그렇게 안정적으로 지나갔다. 문제는 1월부터 시작되었다. 12월 말 일. 비슷한 업종의 소규모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결과는 당연히 떨어졌다. 간절하지도, 열정적이지도 않은 마음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탈락이라는 벌을 받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말 연초를 부모님과 함께 보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월 초. 그때부터가 온전히 나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간의 시작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암울한 미래에 대한 상상이 피어올랐다.


백수는 어떻게 하루를 버티며 사는 거지? 어떻게 내가 이 시간을 견디지? 1월 내내 불안했다.


모든 것의 부재로 완전히 독립된, 오롯하게 혼자 견뎌야 하는, 24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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