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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 – 대니얼 J. 시겔

높은 길로 나아가는 평생 학습의 기회

by 박소형
아기보다는 일반 가전제품이 더 상세한 취급설명서와 함께 온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 나온 문장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고가의 가전제품을 다룰 준비보다도, 한 생명을 돌보는 육아에 대한 준비가 덜 된 채로 부모가 되는 경우가 많다. 육체만 어른과 같은 수준이고 마음엔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거나 자신이 진짜 어른이라고 느끼기는 어려운 미성숙한 상태에서, 육아라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업무를 갑자기 떠맡게 된다.



나 역시 결혼과 함께 바로 찾아온 아기들을 마음의 준비 없이 돌보기 시작하여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기를 돌보느라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어 육체적인 피로가 쌓여가고 아기가 잘 동안만 허용되는 혼자만의 시간엔 집안일을 해야 했다. 주말도 없이 지속되는 독박 육아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컸지만 나 자신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회피형 아버지와 아버지의 몫까지 애정을 챙겨주려던 어머니의 희생을 보고 자라 서였을까. 엄마라면 당연히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편이나 친지들에게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버텨냈다. 현재의 내가 그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육아는 평생에 걸쳐야 하는 일이니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너만의 시간을 가져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독서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육아서는 육아를 시작하던 나의 시절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소아정신과 최고 권위자 대니얼 J. 시겔과 유아교육 전문가인 메리 하첼의 공저 <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가 바로 지난주 독서모임에서 만난 책이다. 부모 자신의 내면 상태와 과거 경험이 아이의 정서 발달과 애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하는 책으로 가전제품 사용설명서보다 훨씬 중요한 내용이 많아서 이 책을 육아를 시작하기 전에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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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아쉬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육아는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첫째에게도, 사춘기를 지나가는 둘째에게도 엄마의 역할은 지속되어야 하기에. 어쩌면 지금이라도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다. 자녀와의 지속적인 관계에 분명 많은 도움이 되어 더 행복한 삶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나침반이 될 테니까.



이 책을 보고 꼭 실천하고 싶은 것은 아이의 경험을 되짚어주는 서기관의 역할을 하라는 부분이다. 어떤 의미에서 부모는 아이의 경험을 기록하고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되짚어주는 서기관이라고 정의한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성찰적 대화를 통해 아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처음으로 배운다. 성찰적 대화는 외적 행동의 기저에 깔린 내적 작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또 그런 점에서 일관성을 길러준다. 아이들의 경험을 정리하여 말해주고 당황스럽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을 다시 한번 이야기해 준다면 아이들은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더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그 상황을 이해하면서 아이들의 스트레스가 크게 완화된다.



부모는 자녀의 행복을 바라지만 소통의 과정에서 갈등을 겪고 평정심을 잃어 분노하는 경우도 있다. 저자는 이러한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경우를 낮은 길의 마음 상태라고 정의하는 데 실제로 인간의 뇌의 가장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반면에 아이들의 도발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합리적이고 신중한 사고 과정을 거치는 높은 처리 모드 즉, 높은 길은 뇌의 윗부분에서도 가장 앞에 위치한 전전두피질이라는 부분을 사용한다. 저자는 낮은 길로 들어서려는 순간 심호흡을 하고 숫자를 세거나 잠시 멈춰 물 한 잔을 마시며 감정적 타임 아웃을 가짐으로써 상황을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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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처럼 육아는 평생 학습의 기회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자신은 물론 타인과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형성할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모두 좋은 부모가 되길 원한다. 나의 어린 시절은 비록 행복하지 않았더라도 반드시 훌륭한 부모 아래서 자라야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다시 양육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빛을 보는 것은 아이들 뿐만 아니다. 우리 자신도 훨씬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기 이해가 깊어지면, 나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나와 자녀와의 유대감을 높일 수 있다. 나와 나의 부모님이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을 가정하고 시작하여 비난이나 평가 대신 그저 나에게 너그러워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려 높은 길 상태에서 아이들과 연결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의 과거는 부모가 나를 돌보았던 경험의 기억이고 현재는 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경험이다. 미래는 내가 노쇠한 부모를 돌볼 것이고 더 먼 미래는 아이들이 나를 돌보는 경험으로 연결될 것이다. 결국 서로 연결되어 돌봄을 주고받다가 떠나는 게 인생이 아닐까. 돌봄을 주고받으며 서로 깊이 연결되는 과정이 평화롭기를 바란다.



우리는 연결된다.
우리는 한 사람의 마음을
다른 마음으로부터 분리하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서로 연결된다.
우리는 일생에 걸쳐 펼쳐지는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와 연결된다.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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