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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Jul 27. 2017

9. 즉흥

자발적 백수

방을 구했다. 서귀포시에 있는 방. 제주도 가는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서야 겨우. 손을 놓고 있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지낼 곳을 구했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무계획적이라니.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움직였던 이전 패턴과는 전혀 다른 모습다. 나 왜 이러지?


놀랍고 낯선 느낌보다 이상하게 해방감이 들었. 미리 계획을 세우면서 드는 에너지, 그 시점이 왔을 때 좋든 싫든 그것을 실행해야 하는 에너지 등등. 이런 힘이 안 들 좋았다. 많이 지쳤던 것 같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세심하게 챙기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 식으로 에너지를 쓰다 보니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줄곧 받. 기분이 좋지 않은데도 애써 노력해야 한다거나 무엇을 하고 싶은데 하지 않고 딴 짓만 하고 있다는 기분들. 이런 것들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적절한 타이밍과 우연으로도 인생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행기표를 끊은 것도 제주도에 방을 얻은 것도. 그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다가 닥쳐서 움직였는데일이 진행됐다. 황당하고 어이다. 그렇지만 됐다. 인과의 법칙대로 열심히 노력해야 튼실한 열매를 얻는 줄 알는데. 놔버려도 괜찮았다. 


더불어 멍 때리는 시간도 늘었다. 시선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멍 때리고 있으면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생각난다. 했어야 하는데 못한 것들, 잊어버렸던 것들, 복잡해서 뭐가 뭔지 몰랐던 것들도 차근차근 풀어져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꽁꽁 숨거나 상황에 밀려서 휙 지나가버린 감정들도 다시 올라온다. 신기하게도 감정에 휩싸이면 하고 싶은 일들이나 해야 할 일들이 떠오다.


이런 내 상태가 살짝 걱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살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진 것도 하나 없이 노년을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노숙자가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긴 하지만 기운이 없어 멍 때릴 수밖에 없다. 걱정하는 것조차 힘이 들어 생각 자체를 안 했다. 안 했다기보다는 못 했다. 


그랬더니 주변 사람들이 나서서 걱정을 해줬다. '이런저런 일자리가 있으니 지원해 봐, 취직시켜 줄 테니 이력서 가져와' 같은 적극적인 지원부터 '멍 때리고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봐, 가만히 있지만 말고 얼른 알아보는 게 어때'라는 가벼운 조언까지. 나를 바라보는 근심 어린 표정들을 보면서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애정과 관심이 느껴져서. 내가 이렇게 사랑받는 사람이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 뿌듯하고 감사하다. 힘들게 애쓰며 살아왔는데 가만히 있어도 일이 잘 되어가니 너무도 놀랍다. 믿는 구석이 많아지니 걱정도 사그라들었다.


평소에 편한 상태로 있으니 힘을 내야 할 때, 집중해서 무언가를 해야 할 때 잘 할 수 있는 것 같다. 비행기표를 끊고 방을 구하고. 이 두 번의 경험이 전부지만. 재미있고 성공적이었다. 며칠 남지 않은 제주행. 무엇을 할지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것도 안 알아봤다. 제주에 한동안 이렇게 지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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