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백수
한낮의 해를 가린 먹구름이 자욱이 깔려 제멋대로 비를 쏟아내는 나날이다. 사방을 뒤덮은 우중충한 어둠이 묘한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밝음 안에서는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만 할 것 같지만 어둠은 그렇지 않다. 빗줄기가 창문을 투둑투둑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아무렇게나 흘러가도록 두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때로는 세차게 퍼붓다가 옅어진다. 그러다 멈춤. 언제 다시 비가 쏟아 질지 모르는 긴장된 정적이다. 축축하게 젖지 않은 것이 없어 축축한 것들을 애써 감추지 않아도 된다.
아침 일찍부터 가족들이 일터에 나가기 위해 부산스럽게 준비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소리 그 자체보다는 소리와 함께 전달하는 감정이 박혀 들어왔다. 사랑이 담긴 달콤한 소리는 데시벨이 작다. 닫힌 방문을 뚫고 들어오는 소리는 부정적인 것들 뿐이다. 분노, 짜증, 신경질, 원망. 서로를 겨눈 감정들이 나에게도 꽂히고 불안과 공포가 잠을 깨운다.
가족들이 사라지고 창밖의 빗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잠이 코끝부터 오른쪽 뇌에 달랑달랑 붙어 아직 전부 날아가지 않았지만 빗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인다. 참을 수 없는 유혹에 못 이겨 몸을 일으켰다. 비 오는 날이면 숲은 커다랗게 부풀어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생명력을 뿜어낸다. 숲 생각이 간절했다.
도심의 아파트에 살고 있음에도 걸어서 5분 거리에 산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산책로를 걸으며 산이 없었으면 진작 이 집을 나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계략일까 아니면 나 스스로 미끼를 문 것일까.
산 밑에는 정갈하면서 옹골찬 작은 한옥집이 있는데 한옥으로 들어가는 길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을 알고 싶어지는 거대한 풍채. 사방으로 퍼진 여러 갈래의 뿌리들이 구불한 알통을 자랑하며 땅에 단단히 박혀있다. 몇 명이 와서 둘러싸야 손을 잡을 수 있을지 궁금한 우람한 밑동과 곧게 뻗은 줄기, 한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넓게 하늘을 둘러싸고 있는 가지. 푸른 잎사귀들을 흔들며 손짓하고 있었다. 일주일째 지속되는 장마의 한가운데서 나무는 물이 올라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우직끈. 땅 깊숙이 뿌리내리는 소리가, 하늘 높이 가지를 뻗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느티나무 주변을 삥 둘러 일정 거리로 다른 나무들은 접근하지 못했다. 여왕개미를 보필하는 일개미들 같이, 나무들이 느티나무를 호위하는 것 같았다.
느티나무를 지나 흙과 풀 냄새가 진동을 하는 숲으로 들어갔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꼿꼿이 서있기도 뒤엉켜있기도 했다. 모양과 냄새, 특징 등 인간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정의 내린 지식뿐이겠지만, 무엇인지 알고 싶은 식물들도 있었다.
온통 초록. 연두와 연녹색, 진초록과 청록, 녹갈색.. 차마 이름 붙이지 못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녹색들이 어우러진 숲 속에서 나는 홀로 인간이었다.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가. 그럼에도 이들 안에서라야 위안을 얻는 것은 왜인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양분을 섭취하고 자손을 퍼트려 살다 죽는 무리들 속에서. 왜 나와 같은 종인 사람들 속에서는 안도할 수 없고 편안할 수 없는가. 새삼스럽던 질문이 사무쳤다. 오전 9시 30분. 한 할머니가 산책로를 지나갔다. 숲 속에 덩그러니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까 얼른 몸을 숨겼다. 산도깨비처럼 홀로 있는 모습이 괴상해 보일까봐. 숨을 죽여 할머니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계속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내려가기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