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백수
퇴직금이 들어오는 날이다. 당장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아침부터 신경 쓰였다. 오후 늦게나 입금해준다는 것을 아는데도. 과연 얼마나 넣어줄까? 100만 원은 넘었으면 좋겠다.
일주일에 이틀 출근, 하루 8시간 근무, 초과수당 없음. 세전 50만 원이 내 월급이었다. 원천징수 3.3%의 세금을 제하고 나면 48만 원 정도 받았다. 4대 보험 가입자가 아니기 때문에, 만약 가입자였어도 자발적 퇴사자이기에 실업급여는 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 받을 돈을 끝으로 통장에 누군가 돈을 넣어 줄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단 몇 만 원, 몇 천원이 아쉬웠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대학교 4학년무렵, 우연히 참석한 청년 토론회에서 30대 초반의 언니가 "한 달에 100만 원 정도만 꾸준히 벌었으면 좋겠다"라고 발언했었다. 속으로 서른 살이 넘어서 100만 원도 못 번다니 진짜 한심하다 생각했다. 역지사지가 따로 없다더니, 그 나이가 된 지금 나는 더 한심하다. 다음에 다닐 회사를 정한 것도 아니고 얼마 벌지도 못했던 직장까지 때려치우다니. 이래서 남을 비웃으면 안 되는 모양이다.
뭘 믿고 이러는 걸까? 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걸까?
이렇게 사는 내 꼴을 보며 지인들은 "불안하지 않아? 돈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 "나 같으면 절대 못 견딜 거야."라며 걱정한다. 숨 쉬는 것처럼 불안이 습관이 되어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철이 없는 것일까.
부모님의 집에서 지내고 있으니 주거비와 관리비가 안 든다는 커다란 혜택을 받고 있다. 부모님 두 분은 평생 안정적이고도 성실하게 생활하셔서 그리 크진 않지만 자식들에게 독립된 방을 줄 수 있는 본인들 소유의 아파트 한 채를 갖고 계신다. 동년배들은 은퇴를 하는 추세이지만 일하는 것이 좋다며 출근하신다. 이런 부모님이 계시기에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 것일까.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일터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이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때로는 실패도 하면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어엿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집이 어려웠다면, 먹고살기 힘들었다면 나도 그렇게 했을까? 수천수만 번 물어봤다. 당장 누울 자리와 먹을 음식이 없다면 어떡할래? 나도 일터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투지를 남김없이 발휘해 내 자리를 만들고 지켰을 것이다.
부모님을 믿는 구석이라고 하기에는 심란한 생각들을 자주 하긴 한다. 부모님이 나를 내쫓을 그날이 오늘이 될 수 있다는. 오늘 당장 옷과 책 몇 권을 들고 집을 나와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돈이 있어야하는 일상들이 싫다. 집, 자동차, 비싼 물건들. 전혀 갖고 싶지 않고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의 결혼과 출산, 육아. 나에게는 먼 이야기이다. 결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고 또 결혼하고 싶지도 않다. 돈이 없고 무능력하니 무의식에서 자연스럽게 포기한 것인데 내 자존심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결론 내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돈을 많이 벌 필요가 없었다. 술 사 먹고 여행 갈 정도만 있으면. 그 정도 돈은 아주 쉽게 벌 수 있으니. 지난 5년간 월평균 50만 원 정도를 벌면서 모든 욕구를 충족했고 조금의 저금도 했으며 몇 번의 연애도 했다. 부모님께서 이런 내 속마음을 알면 '얘가 큰일 났네, 당장 나가!'하실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꽁꽁 숨기며 몰래 글로 쓴다. 설거지, 청소, 빨래를 하는 착한 자식인 척하며.
어떻게 하면 돈이 벌고 싶어 질까? 이런 멍청한 생각이 들면 바로 다음 목소리가 고개를 든다. 너 지금 뭐하고 싶니? 사는 건 명사가 아니라 동사 아닌가. 끝없이 행위들을 이어 시간을 통과하는 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만족스러운가에 집중되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이런 생각들. 글을 쓰고 싶다. 이 생각으로 돈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저녁 5시, 월급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145만 원이 입금 됐다. 아싸! 신난다! 145만 원어치만큼은 살아있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