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지겹고 지겹던 내 부모의 결혼생활은 내 나이 17살 때 종결되었다. 고 1 입학을 앞둔 늦겨울 끝에 시작된 이혼소송은 고2의 가을이 돼서야 마무리가 되었고, 그렇게 그들은 더 이상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 않는 타인이 되었다. 한 사람의 외도와 법적인 처벌, 그리고 외가 식구들의 개입이 순차적으로 이뤄지면서 이혼이 진행되었다. 이혼에 대한 의사결정과 달리 이혼 소송은 2년여의 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니, 이혼 소송의 핵심은 재산 분쟁이었다. 서로가 이 재산을 일구는데 더 큰 몫을 수행했다고 주장하며 상대의 몫을 뺏고자, 그리고 자신의 몫을 뺏기지 않기 위해 이뤄지는 지난한 싸움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 동생의 존재는 없었다. 양육권에 대한 논의는 이 이혼에서 다루는 매우 작은 부분이었고, 한 사람이 양육권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빠른 의사결정을 함으로서 더 이상 논의가 필요없게 된 사안이었다. 나와 동생이 그렇게 처리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배신감을 나는 잊지 못한다.
재산분할 주장과 건물에 대한 가압류, 그리고 법적 분할에 이르기까지.. 그렇게까지 진행되는데 2년의 시간이 흘렀고 재산분할과 이혼 과정은 마무리되었다. 단 그때까지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 진흙탕 법적 다툼이 단지 서로가 선임한 변호사들의 배만 부르게 해 준 과정이었음을. 소송이 끝난 후 변호사의 수임료 정산을 끝난 후에야 이 과정의 최종 승자는 변호사임을 알게 되었으리라. 오랜 시간이 흘러 당신들의 욕심에 애써 이룬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음을, 그리고 바보 같은 싸움에 변호사만 배불렀음을 직면시켰을 때, 서로의 대답이 동일하였다. "그래 왜 그랬을까, 지금이라면 안 그럴 텐데. 하지만 그때는 너무 미웠다. 미워서 그랬어."
진흙탕 싸움이 어찌 되었건,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에게는 나와 동생이 버려진 존재라는 건, 당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법정 싸움은 우리와 별개로 진행되었고 엄마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이혼 진행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는 기존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생활하였으니까. 변화라면 별거와 이혼소송이 시작되던 고1의 봄부터 집에는 고요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이혼은 그 공간에서 부친만 제거되는 과정이었으며, 드디어 더 이상의 다툼이나 비난이 없고 칼을 숨겨야 하는 불안감도 없는 생활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졌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신축한 새 건물로 이사 온 거의 직후부터 별거가 시작되었기에 그 공간에는 부친의 기억이 담겨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집은, 그 공간은 원래부터 나와 동생, 엄마만 존재하던 곳, 갈등이 없던 곳과 같았다. 간간이 걸려오던 부친의 전화로 인해 심리적 안정감이 깨어지는 경우와 양육비를 달라고 부친에게 전화를 하라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전화를 걸어야 하는 때를 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에게 잘 지내라는 말보다 엄마가 재산을 다른 데 쓰지 못하게 지키라는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부친의 말에 서러움과 함께 혐오감이 올라왔다. 고 1 여자아이에게 재산을 지키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에 그런 말을 하고 다짐을 받으려 했던 걸까. 뭐 그리 대단한 재산과 가치라고 지켜야 한다고 했던 걸까. 아직도 이해불가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이혼 최송 판결문을 그들이 아닌 내가 아직도 가지고 있다. 누구한테 받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최종 판결문을.. 아직까지 나는 그 판결문을 읽어보지 않았다.
싸움과 불화의 누적으로 내게는 결혼과 행복한 가정에 대한 환상과 기대는 애초부터 자리하지 않았다. 어떤 소설에서 읽고 뇌리에 담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계약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해서 명절 때 친인척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으니, '결혼은 원치 않을 때 파기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계약 관계여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가 더 어린 시절부터 내게 씨앗을 뿌리고 견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질적거리고 파괴적인 싸움 없이 깔끔하게 계약된 기간 동안만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
헌데 왜 '계약'이라는 제한된 설정을 두고서라도 "관계'를 굳이 맺고 유지하기를 원하는 거였을까..
태생적으로 혼자는 있을 수 없음에 대한 반증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