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견디기 힘든 화와 억울함을 억누르고 견뎌내는데 소비하는 에너지가 커서인지 나는 자주 아팠다. 지금은 많이 약해졌지만 두통은 여전히 내 고질병 중 하나이다. 그 시절 경험하던 죄책감과 불안정감, 이름 붙여주지 못한 감정들이 짜증과 신경질이란 형태의 모호한 불쾌한 감정 덩어리들로 표현되었고, 늘 안정 수위를 넘어설 정도로 찰랑찰랑하게 차오른 그 감정들을 억누르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모해왔다. 한정된 에너지의 대부분을 감정 억압에 소비해왔으니, 일상은 늘 부족한 에너지를 쪼개어 생활하는 상태였고 신체기능 저하에 더하여 억압된 화가 불쑥불쑥 의식 수준으로 치고 올라오는 걸 감시하느라 머리가 아팠던 것이리라. 심리학을 전공하고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내 두통의 근원이 '화'라는 걸, 그리고 억제된 내 부정적인 감정이 '짜증'과 '신경질'이라는 미분화된 형태로 지금까지도 발산되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가용한 에너지의 대부분을 불안과 화를 억누르는데 쓰느라, 일상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늘 부족했다. 불균형적인 신체 예산 분배의 결과였다. 중학교 2학년의 어느 날부터 나는 하교 후에 늘 잠을 잤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밤 9-10시 사이, 저녁식사가 끝난 시간이었다. 우연히 초저녁 잠을 잔 이후에 혼자 밤 시간을 보내며 평화로움을 경험한 어느 날부터, 저녁 식탁에서 냉랭하게 오가는 그 차가운 공기를 느끼지 않기 위해 그 자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잠을 잤다. 잠자는 그 시간, 그리고 혼자 일어나 간단하게 식사를 챙겨서 혼자 있는 그 시간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식사를 챙기러 나갈 때 마주치는 엄마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해지던 어느 시점부터는 과자 한 박스, 초콜릿 한 박스를 사서 방에 두었고, 때때로 저녁에는 과자와 초콜릿만 먹기도 했다. 그리고 싸움이 심했던 어느 날부터 나는 부모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물음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선택적 함묵증'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때는 단지 말하지 않는 소극적 반항이라고만 생각되었던 그 행동에 정신과적 진단이 내려진다는 것을 임상심리를 전공하며 알았다.
심리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선택적 함묵증은 새롭고 낯선 상황에 대한 '불안' 반응으로 나를 드러내지 않고자 할 때 생겨나는 이상 행동 중 하나이다. 대부분 가정이나 친척들, 익숙한 공간과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언어적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보이지 않는 반면, 새로운 환경인 학교나 평가를 받는 장면들에서 입을 닫는 형태로 나타나 사회적응의 어려움을 유발하는 불안 장애의 한 유형이 선택적 함묵증이다. 다만 나는 이와는 정반대로 익숙한 대상인 부모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증상 양상을 보였다.
정신역동적으로 볼 때 함묵증은 외부로 불안감과 화를 표출하지 못하고 내부로 억제해야 할 때 발생된다.
그렇다. 내 선택적 함묵증의 원인은 불안이 아니었다. 그들의 싸움에 대한 짜증과 화, 불안정한 분위기를 유발하는 이 모든 환경에 대한 분노 반응이었다. '그놈'과 '그 년'으로 이뤄지는 그들의 편집적인 의심과 서로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고 배려해주지 않는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그 이기적인 모습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들의 싸움과 분노에 가려져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기에 오롯이 지켜봐야만 했던, 어른답지 못한 그들에 대한, 미성숙한 그들을 향한 분노였으며, 이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권도 없이 상황에 노출되어야만 했던 아이의 무기력감과 억울함이었다.
그렇게 1-2달이 지나갔을 때쯤, 부모는 저녁식사도 하지 않는 채 늘 잠만 자는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식탁에 앉히고 물었다. 도대체 왜 말을 하지 않는지, 왜 그러는지... 대치된 침묵 속에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싸우는 소리가 정말 듣기 싫다." 고 짧게 답했다. 내 답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이어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앞에서 싸우지 말라는 얘기를 울면서 했던 장면만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차라리 이혼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였던 것도.
그날 이후로, 적어도 집 안에서의 싸움은 줄어들었다. 차라리 이혼을 하라는 내 말이 그들에게 자극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전과 같은 큰 소리들이 들리는 횟수는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이혼을 소망했다. 그래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이는 비극이, 붉은 피가 낭자하는 내 공상이 실현되지 않을 테니까.
DSM-5(정신질환 진단 통계 편람 5판)에서 선택적 함묵증(Selective mutism)은 불안장애의 하위 장애에 포함되어 있다. 사회적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말하는 것에 실패하는 것이 주 증상으로, 주로 익숙한 공간이나 대상과의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 외의 상황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증상으로 발현된다. 적어도 1달 이상 지속되고 장해로 인해 사회적 의사소통을 방해하거나 학업적, 직업적 장면에서의 성취를 얻는 것에 실패할 때 진단된다.
선택적 함묵증이 속해 있는 장애군이 불안장애에 속해 있는 만큼 선택적 함묵증은 자신의 목소리나 말, 생각 등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높을 때 출현하며, 통상 언어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뤄진 5세 이후에 언어장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대상이나 공간이 아닌 곳에서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을 경우에 고려된다. 임상 장면에서 만난 선택적 함묵증을 가진 아이들의 경우에는 예민한 성향과 새로운 환경에의 노출에서 불안감이 높은 아이들이 많았고,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받았거나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하면서 반복적인 질문을 받는 경우에도 특정 장면에서는 말문을 닫는 함묵 증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체적으로 임상 장면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평가와 진단을 받는 시기는 6-7세 경으로, 교육기관의 입학을 앞두고 아이의 적응 곤란을 걱정하면서 내원하게 된다.
성인의 경우에 선택적 함묵증을 경험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며, 의도적으로 특정 상황이나 대상에게만 말하지 않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말을 참는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투여되는 작업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자 할 때 우리는 최대한 에너지를 나에게만 집중하고 외부의 요청을 거절한다.
여러분은 말하지 않고 얼마 동안이나 지낼 수 있을까? 물론 지극히 내향적이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라면 별다른 불편감이 없을 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침묵을 유지하는 것을 힘겨워한다. 침묵하는 동안의 어색함을 이겨내는데 에너지를 투여해야 하고 발화하고픈 내 욕구를 철저하게 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타인과 교류를 거부하는 침묵에는 통상 외부 대상에 대한 화와 공격성을 담고 있기에, 대상을 향한 분노를 억제하고자 많은 에너지를 투여해야 하고 내적 갈등까지도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Hayden(1980)은 '선택적 함묵증'을 유발하는 심리적 정신역동과 행동 양상에 따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공생적 함묵증, 수동-공격적 함묵증, 반응적 함묵증, 언어 공포적 함묵증. 이 중 수동-공격적 함묵증을 제외하면 그 기저에는 불안이 자리한다. 반대로 수동-공격적 함묵증은 침묵을 무기를 삼는 경우로, 아동의 적대감이 '말하는 것에 대한 반항적 거부'로 표현될 때 나타난다. 내 경우가 수동-공격적 함묵증에 해당한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 경우에 말문을 닫는 경우에는 선택적 함묵증이 아니라 언어 증상을 동반한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로 진단되며, 이는 신체 증상 및 관련 장애의 하위 장애이다. 충격적 사건을 발화해서는 안된다는 무의식적 압박감에 압도되는 경우에 전환장애의 유형으로 함묵증을 경험할 수도 있다. 다만 선택적 함묵증이 익숙한 대상과의 대화에는 어려움이 없는 반면, 언어 증상을 동반한 전환장애의 경우에는 대상과 상황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언어적 의사소통에 곤란을 경험한다. 이러한 발병 시기와 임상적 양상의 차이로 두 장애를 변별하여 진단한다.
참고> DMS-5에 준하여 새롭게 쓴 소아정신의학 _ 대표저자 홍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