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 다시 쓰는 그림일기

부르주아 따라 하기

by 달숲

부르주아의 전시를 보고 난 후 뮤지엄에서 판매하는 엽서를 사 왔었다. 엽서에는 부르주아가 초창기에 그린 드로잉과 일기, 그리고 천을 바느질해서 책자처럼 만든 작품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 엽서들을 액자에 넣어 작업실 책꽂이에 세워두었다. 매일의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서 기록해 두면 예술이 될 수 있구나. 나도 나의 오늘을 기록해 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책꽂이를 둘러보는데 몇 달 전 다이소에서 사 왔던 천 원짜리 작은 수첩이 눈에 띄었다. 문구류를 좋아해서 예쁜 수첩과 펜을 자주 사는데 그것들을 살 때에는 늘 그 안에 영감을 가득 담아 예술 작업을 시작하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새로 산 수첩에 멋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독특한 자수 도안을 그리는 나를. 수첩을 펼치니 몇 장의 그림과 메모를 끄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작업실 일기를 그림으로 꾸준히 그려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도전은 새로운 습관으로 자리 잡기도 전에 내 안의 냉정한 비평가를 만났다. ‘이렇게 그림도 못 그리는데 무슨 그림일기야, 나는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잘 그리지도 못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따로 있어’ 등등. 내가 내린 평가 앞에 무릎이 꺾인 나는 수첩을 얌전히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처음부터 위대한 예술 작품을 하려고 했던 내 안의 완벽주의가 문제였다. 나는 완벽은커녕 너무나 어설프고 빈틈 많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40대 후반의 늦둥이 엄마였다. 그런 내가 나에게서 나온 결과물은 완벽하길 바랐으니,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나의 어설픔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그리려고 하는 것은 완벽한 그림 자체가 아니다. 하루를 여러 정체성으로 쪼개 살며 쌓인 할 일들 속에서 나는 늘 나만의 방으로 도망쳤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목구멍까지 뭔가 꽉 찬 기분이었다. 그렇게 체한 것 같은 느낌으로 살면서도 정작 나는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아 늘 불안했다. 그게 뭘까. 나는 내가 놓친 하나의 장면을 찾아 수첩에 담아보고 싶었다.


일단 부르주아를 따라 해보기로 했다. 뭐든 적고 그리고 기록해 보자. 기록이 쌓이다 보면 나는 그 안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매일 저녁은 외출했던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와 식사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시끌시끌 대화도 나누며 각자의 휴식을 즐기는 시간이다. 낮 동안에는 작업실에서 유튜브 대본을 쓰거나 편집 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거실 탁자에 앉아 드로잉 일기를 썼다. 매일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 하나를 사진으로 찍어놓고 어설픈 그림 실력으로나마 따라 그려보기로 했다. 펜으로 대충 형태를 따라 그리고 둘째 아이의 색연필을 빌려와 색칠했다.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하던 유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알록달록 색연필이 굴러 다니는 즐거운 그림 그리기 시간.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아홉 살 딸이 다가와서 내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엄마, 색칠은 내가 해줄까? 내가 색칠해주고 싶다.”

나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돼. 이건 엄마 그림이야. 이제 엄마도 그림 그리고 일기 쓸 거야. 우리 저녁마다 거실 테이블에서 각자 자기 그림일기 쓰자.”

딸과 강아지 봄이도 탁자 옆 거실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오늘은 뭘 그리지. 생각하면서 하루를 돌아봤다.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거리며 사진을 찾기도 하고,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이야기와 사물을 찾았다. 그리고 그 사물을 찍은 사진을 수첩에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시작하고 나니 그다음은 쉬웠다.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나서 작은 수첩에 기록을 남기는 그 시간은 물질을 하던 해녀가 물 위로 올라와 숨을 고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하루의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림일기를 쓰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가 그린 이 어설픈 그림을 나중에 다시 보게 될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이 기록이 훗날 희미해진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고, 행복하고 귀여운 순간들로 오늘을 회상하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날들이 귀엽고 소중한 그림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갔다가 카페를 들렀고 그곳에서도 드로잉 일기를 썼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각자의 그림을 그리는 시간. 몽글몽글한 우유 거품 위에 커피로 그린 귀여운 그림 같은 하루들이 수첩 속에 담겼다. 그렇게 그린 드로잉 일기를 인스타에 올리기 시작했다. 지인들이 재미있게 봐주기 시작했고, ‘좋아요’ 수도 올라갔다. 초보 유튜버이자 도파민 중독자에게 ‘좋아요’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원동력까지 얻으니 매일 드로잉 일기를 쓰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점점 작업실에서 유튜브 편집 일을 하는 것보다 집에 돌아와 드로잉 일기로 오늘을 회상하고 기록하는 시간이 내게 의미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림으로 그려야 하니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고, 펜으로 라인을 그린 그림에 색칠을 하는 동안 호흡이 차분해지며 그날의 이야기와 내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 생각들을 그림 옆에 글로 써내려 갔다. 원래는 그림을 그리고 짧은 메모만 남기려고 했었는데, 메모가 점점 길어져서 일기가 되었다. 그렇게 일기를 쓰고 나면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곤 했다.


드로잉 일기를 쓰기 위해서 하루를 좀 더 관찰하면서 살게 되었다. 아이들이 하는 말, 아이들과 먹는 음식이나 입었던 옷 등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고 하루를 열심히 집중해서 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린 사물에 관한 그날의 이야기를 적다 보면 어느새 글은 과거의 어떤 순간을 호출했고, 내 생각으로 이어졌다. 한없이 길어지려고 하는 글을 손바닥 만한 작은 수첩 2페이지 분량에 맞춰 서둘러 마무리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일기 쓸 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중에서 순위를 정해서 써야 했다. 내가 나만의 방으로 도망치고 싶어 하며 숙제라고 여겼던 이 삶 속에도 기록하고 싶은 장면들이 많았구나. 새삼 내 일상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루하루 한 순간도 허투루 살고 싶지가 않았다. 드로잉 일기를 쓰며 연말이 지났고 아이들의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꽉 찬 2개월을 집에서만 보낼 아이들과의 겨울방학. 아이들의 삼시 세 끼를 지어 먹이며 보내게 될 엄마의 특근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 시간을 갖기 너무 힘들 테고, 기껏 만들어둔 나만의 방으로 도망칠 시간조차 내기 어려운 날들이 되겠지만, 그래도 이젠 좀 괜찮을 것 같다. 내 손에는 작은 수첩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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