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by 원윤경

연말 좋은 일이...

때 : 2025년 12월 18일(목) 오후 3시 30분

곳 : 서울YMCA 2층 우남 이원철 홀

(서울YMCA - 종각역 3번 출구에서 97m)

나라를 사랑하는 분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헐버트 박사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최고상인 무궁화상(국가보훈부 장관상)은 최미교 씨가 수상했다. 이밖에 백두상(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상) 2명

한라상(독립유공자유지계승유족회장상) 3명 아리랑상(서울YMCA 이사장상) 5명, 아리랑상 학생부(국악신문사 대표상) 3명이 각각 수상했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원 윤경


선교사 헐버트는 19C 말 척박한 땅에 심어진 연약한 조선을 보았다. 잎은 시들고 뿌리는 메말라가는 조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조선을 보았다. 그러나 헐버트는 조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고 사랑을 나누면 잎이 자라고 뿌리가 자라고 꽃이 피어나리라 믿었다.


그 신념 하나로 조선을 조선인보다 더 사랑한 헐버트. 그가 보기에 조선에 필요한 물은 교육이요, 조선에 필요한 영양분은 사랑이었다. 이 책은 조선의 어두운 역사 속에 뛰어들어 꺼져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빛을 던진 헐버트 선교사의 온전한 사랑과 구한말 우리 조선에 대한 살아있는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헐버트는 마치 뜨거운 열정을 다해 연인을 사랑하듯 그렇게 조선을 사랑했고 시들어가는 조선이 다시 피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그는 죽기까지 조선을 사랑했다. 이 책은 단순히 한 외국인의 전기를 넘어, 조선 말기의 고난과 희망을 함께 담고 있는 역사적 서사이다.


당시 조선은 외세에 의해 흔들리던 혼란의 시기로, 국가의 자주권은 위협받고 민중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뒤 나라가 어수선한 때였다. 1882년 조선에서는 구식 군인들의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려있었다. 그나마 지급된 한 달 치 쌀에는 겨와 모래가 잔뜩 섞였다. 참으로 부패한 정권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선의 임금과 정치인들이 얼마나 백성을 힘들게 했는지 안타까웠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가난하고 지친 조선 백성과 무능력한 정치인을 깨우치기 위해 수고한 헐버트 선교사의 사랑과 헌신이 얼마나 큰지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났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내적으로는 부패한 조정과 혼란한 정국, 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국가를 근대화하는 데 성공했고, 조선을 자국의 세력권으로 삼기 위해 치밀한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외교적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결국 을사늑약의 체결과 '한일 합병'을 통해 나라를 빼앗겼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기에 조선을 찾아온 외국인 중 한 명이 바로 미국 출신의 호머 베절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였다.


그는 조선이라는 낯선 땅에서 한 나라와 민족을 향한 진심 어린 연대와 헌신을 실천한 인물로, 이 책은 그가 조선에서 어떤 꿈을 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다채롭게 조명한다. 헐버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명문인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1886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근대교육을 담당할 서양 교사로 조선을 찾았다. 이때 설립된 기관이 바로 육영공원,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다.


육영공원에서 헐버트는 단지 영어와 서양 과학을 가르치는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전통문화, 언어, 역사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단순한 제자 이상으로 생각했다.


19세기 조선에서 한글은 여자나 아이들이나 쓰는 글자로 폄하되었다. 사대부 계층은 여전히 한문을 공식 문자로 여기며 한글을 경시했고,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은 지식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비율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대부분 양반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곧 민중의 의사 전달과 정보 접근이 원천적으로 제한되었음을 의미했다.


당시 조선은 전제주의 나라로 신분제도가 있고, 한자를 힘써 공부하고 유교만 준행했다. 교육도 없었고 신앙의 자유도 없었다. 1446년 세종은 소리글자 한글을 창제하여 반포하였지만, 한글은 조선시대 내내 나라의 공식 문자로 대접받지 못했다. 한글 창제 이후 성종 때까지는 한글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으나, 연산군이 1504년 한글 사용을 엄금한 이래 조선 중후기는 한글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한자를 많이 안다는 우월감에 취해 한글 쓰기를 거부하였다. 실학의 대가로 지칭되는 박지원, 정약용도 한글 서적을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조선 중기 허균의 <홍길동전>, 김만중의 <사씨 남정기> 등의 한글 문학과 민간 특히 아녀자들이 한글을 사용한 덕분에 한글은 사라지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학생, 일반인이 볼 책이 하나도 없었다. 헐버트는“조선에 책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조선의 민중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반드시 문자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서양의 제도와 문명을 한글로 풀어쓴 문답서 형식을 택해 <사민필지>를 한글로 편찬하여 전국적으로 보급되도록 노력했다. 이는 조선인의 자각과 계몽에 커다란 불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단지 외국인 선교사나 교사가 아니라, 조선인의 지적 해방과 국민 계몽을 위해 ‘책’이라는 도구를 제공한 선구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한글을 스스로 익힌 후, 세계 언어학계에 이를 소개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너희는 조선의 미래다. 조선을 바꿀 사람은 바로 너희들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그는 조선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교육을 통해 실천한 진정한 ‘문화 사절’이었다. 헐버트의 가장 독보적인 업적 중 하나는 바로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연구하고 이를 세계에 알린 점이다.


그는 조선에서 머무는 동안 한국어를 유창하게 습득했을 뿐 아니라,<The Korean Alphabet>이라는 논문을 통해 한글을 로마자보다 더 체계적이고 우수한 문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글을 ‘가장 발달된 음소문자’라고 칭송했으며, 그 창제 원리를 세계 언어학계에 소개했다. 한글은 그가 보기에 글자를 모르던 백성들도 쉽게 익힐 수 있는 민중을 위한 문자였다.


이러한 인식은 헐버트가 조선 민중을 얼마나 존중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당시 외국 선교사들 대부분이 조선의 상류층 언어인 한문을 중시한 것과 달리 백성들이 쓰는 한글의 가치를 우선시했다.


헐버트는 교육과 학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조선 말기 콜레라가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조선을 강타했다. 1821년, 1859년, 1886년 등 수차례 유행했으며 특히 1886년과 1895년의 대유행은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대응은 미흡 그 자체였다. 질병의 원인조차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전염병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미신과 의심, 처형 등의 수단이 동원되었다. 의학은 점술과 한방 민간요법에 의존했고, 격리, 방역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헐버트는 이러한 조선의 의료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서양의학의 기본 원리인 위생, 예방, 백신 접종 등의 중요성을 교육 현장과 출판 활동을 통해 알리며 서양 보건 체계의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교육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위생교육을 진행했고, 공중보건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 물론 당시 조선의 행정 시스템이 이를 체계적으로 수용하지 못했지만, 헐버트와 같은 외국인의 역할은 당시 의료 후진국 조선에 하나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헐버트는 1896년 <The Korean Repository>라는 영어 잡지에 아리랑에 대한 내용을 실으면서 아리랑을 "한국의 민요(folk song)"로 소개하고, 가사 일부와 멜로디에 대해 서술했다.


헐버트는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한국인의 감성과 역사, 고통을 담고 있는 민족적 노래라는 점을 이해하고 존중했다. 그는 이를 통해 한국인의 정서와 정체성을 서구에 알리는 데 도움을 줬다.


그는 조선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다.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법적으로는 죄가 없는 방법으로 사악한 도둑질을 했다.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거기에 더해 1888년 한반도 남부 삼남 지방에 대흉년이 왔다. 조선은 총체적으로 기근에 시달렸다. 서울의 곳간은 비어 있었고, 약간 있다 해도 기근 지역에 쌀 한 가마니를 보내는데 쌀 두 가마니의 운송비가 들었다.


조선은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세계는 조선을 도우라.' 헐버트는 서울 거주 외국인들과 기근 구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인근 국가들과 미국에 구제를 요청하는 전보를 쳤다. 서울 상주 외국인들이 일차적으로 1천 달러의 구제기금을 조선 조정에 전달했다.


헐버트는 조선에 머무는 동안 서구식 교육 체계 도입, 한글 연구, 그리고 기독교적 선교 기반 형성 등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건강 문제와 부인과 자녀 문제 때문에 1891년 일시 귀국했다.


그는 조선의 독립과 자주성은 외세가 아니라 조선인의 계몽과 자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실현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893년 다시 조선으로 입국했다.


헐버트는 조선의 정치적 운명을 되돌리기 위한 외교 활동에도 직접 나섰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고종 황제는 국제 사회에 일본의 강압을 알리고자 비밀리에 밀사들을 파견했다. 헐버트는 이들 중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았다. 그는 고종의 밀서를 품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조선의 상황을 호소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특사로 참여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 입장이 좌절됐다. 하지만 그는 유럽 각국을 돌며 언론과 강연을 통해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당시 국제 사회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묵인하고 있었기에 그의 활동은 가시적 성과를 얻기는 어려웠지만 헐버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조선은 피어날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슴에 품고 외교 전선을 누볐다. 이에 일본은 헐버트를 조선의 독립을 선동하는 위험인물로 간주했고, 결국 1907년 이후 조선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조선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연대의 마음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이 책은 단지 헐버트의 업적을 나열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헐버트, 외롭고도 힘겨운 투쟁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내면에 집중한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조선인의 아픔을 대변했고, 조선의 민중을 진심으로 존중했으며, 자신의 안위보다 조선의 독립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미국에서 받았던 조롱과 비난, 냉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그의 양심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단지 사명지로 여긴 것이 아니라, 두 번째 고향으로 여긴 사람이었다. “나는 한국인이 되고 싶다.”라는 그의 말은 단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다.


헐버트는 1949년, 해방된 대한민국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그는 고령이었고 건강도 좋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내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귀국했다. 그는 한국에서 사망했고,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원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나는 한국을 위하여 살았고, 한국을 위하여 죽고 싶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방식으로 그의 공로를 기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이름은 대중적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이 그런 점에서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잊힌 역사의 빛나는 조각을 다시 꺼내어, 우리가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인물로 헐버트를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IT와 문화 강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누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가?


헐버트는 조선인도 아니었고, 우리 민족과 혈연적 연관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인보다 더 뜨겁게 싸웠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추모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 정의, 연대, 그리고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일이다. 헐버트는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조국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오늘날에도 혐오와 배척, 국가 간 갈등, 문화적 편견이 만연한 시대에서 헐버트의 삶은 더욱 큰 울림을 준다. 그는 국경과 민족, 종교를 넘어서 사람과 정의를 사랑한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조선은 절망 속에서도 꿈을 꿀 수 있었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는 단순한 인물 전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신념이 어떻게 한 민족의 역사에 희망을 심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작가의 이전글영화 / 맨체스터 바이 더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