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드레스 뜯지 말라니까아!"
그리고 하피는 잠시, 정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가 귀에 비스듬히 올려둔 초록색 휴대폰의 볼륨을 높인다. 뭔가 들리는 게 맞는 거긴 할 텐데, 나로서는 사실 잘 알 길이 없다. 하피는 반응이 느리다. 쉽게 알기 힘들다. 소리를 질러 이름을 불러도 약에 취해 잠이 덜 깬 상태였던 날이 태반이었고, 나는 다만 그 친구가 자는지 안 자는지만을 궁금해했던 적이 많았고, 그 어느 쪽도 아닌 적은 없었다. 어제까지는. 잠에서 깨고 있거나 잠에 들어야만 하거나 정말 너무 다행히도 깊이깊이 잠들어 있거나. 뭐, 그랬다.
"좀, 진짜! 아. 이게 대체 몇 번째니... 아후 정말.. "
이건 작은 절규인가. 엄마의 목소리에 지겨움과 얕은 분노와 지진한 짜증이 묻어 있다. 영어 동요가 끊임없이 나오거나 영미권 만화영화, 또는 뭐 빗소리가 섞인 클래식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고 있는 휴대폰을 들어 머리 옆에 갖다대고 볼륨키를 누르는 걸로 보아 청력은 확실히 있다. 뭔가 청각적인 자극이 들어오는 걸 느끼고는 있다는 거겠지.
보호자가 '메드레스'라는 명칭을 정확히 말한다. 병원에 오래오래 있었거나, 오래 있지 않았지만 아이의 중증도가 높거나, 뭐가 되었던 관련된 계통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 등을 추측할 수 있다. 하피는 이곳에는 오래 안 있었지만 아마도 오래 있게 될 것 같고 중증도는 명확히 높다. 관련된 일? 부모는 시간대를 나누어 번갈아 가며 몇 십분을 들여 하피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주고, 기저귀를 갈고, 하피의 양 팔 다리 또는 그 스무 개 손가락 발가락의 움직임까지를 샅샅이 보며 그 친구가 뭔가를 빼거나 긁어서 벗겨내는 중이 아닌지 매 순간 살핀다. 대가는 없으나 명확히 노동의 형태를 띠고는 있으니 일이 아주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 정말로 'close monitoring' 중인 것이다. 중증도라.. 목에 관을 꽂은 것도 아니고 먹는 것도 입으로 하고 내보내는 것도 카테터가 아닌 기저귀 또는 화장실 변기에 알아서 (그러니까 인체 활동으로서의 자발,의 뜻으로) 한다.
딱 보기에는, 그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른 흐리멍텅한 눈빛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아픈 친구가 아니리라고 판단한다. 내가 그랬다. 아픈 애들은 쌔고 쌨다. 당연하지. 병원이니까. 척 봐도 너무나 '아파'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한, 다채로운 방식으로 고장난 개체들이 모인 곳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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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련, 종양, 발달장애. 몇 가지 단어들로 요약된 그 친구의 아이덴티티. 내게 중요했던 건 경련, 이었다. 저번 입원 때 수시로 경련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 때 잡고 갔던 외래를 보다가 검사를 하러 입원했다. 별 거 없겠다는 생각조차도 않았다. 검사를 주 목적으로 오면 그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퇴원하고 또 외래를 잡아 결과를 듣고 또 꼬리를 물어 검사를 하고 뭐 그랬으니까. 당연히 내일 집에 가는 것에 준해 인계장에 서류, 보호자, 외래 뭐 이런 것들을 적어넣고 있었다. 여하간 나는 그 친구가 내일 퇴원할 것이라 생각했고, 아마 그 듀티의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며, 중요한 건 또 그렇게 경련을 하며 뒤집어져 버리기 전에 빨리 집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생뚱맞게 흉부외과 의사가 보낸 메신저를 보기 전까지는.
'검사 끝나고 올라왔나요?'
'올라오고 있습니다.'
'엄마랑 하피랑 같이 갔죠?'
'넵넵 오시면 말씀드릴까요?'
'오더 냈습니다. 되는 대로 해 주세요.'
흉부외과, TS 라는 약어부터 가슴이 뛰었다. 아. 흉관 꽂나. 아니면 흉수천자인가. 그 때 무슨 스페어였나 뭐였지 그걸 어디서 빌렸더라, 걔는 십몇 키로짜리 어린 애였는데. 하피는 150cm에 50킬로그램짜리 열두 살이었다. 크기가 당연히 다르겠지? 아.. 아닌데. CPA가 그렇게 이상했나? 흠. PET 결과가 벌써 나오나? 두려워졌다. 이런. 뭐가 되었든 내일 퇴원시키기는 글렀다. 아직 컨설트도 안 났는데 웬 TS. 그리고 나는 이내 안타까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거기까지 전이된 게 나왔나? 전이되기 직전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언젠가는 한 번 봤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그 이름조차 생소한 피검사를 갈무리해서 준비해 놓고 핵의학과에서 돌아온 하피를 이송사원님과 엄마와 함께 낑낑거리면서 옮겼다. 이후 내가 돌아서서 복도를 걸어 스테이션으로 향하는 그 새에 잠에서 깬 그 친구는 핵의학과에서 페하 하프트를 풀어헤쳐놓고 당연히 원래대로 감아놓지는 않은 주사 부위에서 뚜껑 비슷한 것을 돌려내어 뺀 모양이었다. 그 위로 피가 콸콸 나와 엄마는 병실 문앞에서 나를 소리질러 불렀다. 나는 뛰었다. 그리고는 당도한 병실 안의 침대와 바닥의 시뻘건 비주얼만큼 사태가 심각하지는 않음에 안도했다. 새 캡을 끼워 넣고, 피 묻은 옷을 벗을 수 있게 수액줄을 잠시 끊고, 핏자국들을 닦고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과 비슷한 의사가 병동에 등장했다. 컨설트는 나 있었다. 하지만 회신을 달아 주기도 전에 보호자를 보러 오다니. 나는 어쩌면 그 때 그 병실로 향하던 그 의사의 뒷모습을 벌써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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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무슨 미어캣처럼 스테이션에서 목을 빼고 (정확히는 엉덩이를 반쯤 의자에서 떼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내게, 하피의 엄마에게 설명했을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해 주었다. 나는 다시 그 병실로 들어가야 하는 때가 언젠지 머리를 굴렸다. 가능한 늦게 들어가고 싶었다. 엄마가 울고 있든 아니든 나는 그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고 불가피하게 침입해서도 적절한 위로의 말을 건넬 자신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감히 내가 위로를 해도 되는 상황인지도 가늠이 어려웠다. 어느 것이든 안 그렇겠냐만은, 세상에는 괜찮아요, 힘내세요 같은 말로 덮어버릴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 나는 분명 이런 상황을 몇 번 겪었던 것 같은데도 생판 남의 불행의 시작과 진행을 관망 아닌 관망하는 이 경험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컴퓨터로 오더를 보는 동안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복도 끝에 향한 병실로 향했다. 거기 가나? 아마 그렇겠지. 정형외과로도 협진이 났고 늦은 오후임에도 회신은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머리를 굴려낸 계획은 쓸모가 없었다. 엄마는 얼마 안 있어 콜벨을 눌러 '지금 좀 와주세요' 라고 했다. 모니터로 띄워지는 산소포화도는 아예 나와 있지도 않았다. 별 수 있나, 또또또 달려야지.
"이거를 다 긁어서 빼려고 해서요.. 다시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피를 닦고서 흰 그물로 칭칭 감아놓은 그 틈 사이로 (정확히는 틈을 만들어냈다는 표현이 맞겠다) 손가락을 넣어 계속 정맥주사 카테터와 수액이 꽂힌 이음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별 일은 아니지만.. 이 정도 주사를 이렇게나 만져 댄다면 앞으로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라고 생각했다. 당장은 다행히도 산소포화도 모니터와 그 정맥주사 하나 말고는 가지고 있는 게 없었지만, 아까 흉부외과 의사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후로는 이건 다행일 수만은 없었다. 오늘만 다행이다, 오늘만.. 내가 물품을 가져와 이런저런 것을 다시 하는 동안 엄마는 작게 코를 훌쩍거렸다.
늦은 오후라 아직 불을 켜지는 않아서 엄마의 눈이 한번에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안 무례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선을 넘지 않을 말을 몇 마디 건넸다. 하루하루에 집중하시는 게 .. 뭐.. 어쩌고.. 그랬나. 주제넘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나 그녀와 하피, 사실은 그녀 혼자를 내버려 두고 쌩 돌아서 병실 문을 향해 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이미 오늘만 살아요. 그런데 또 이러니까.. ' 라고 대답했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마스크 속으로 입술 각질을 뜯어내며 어구를 곱씹었다. 이미 오늘만 산다는 말.
"예전에 항암할 때도 너무 힘들어 했는데 지금은.. 또 어떡해요.."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드라마처럼 안아 드리기라도 해야 하나, 손이라도 잡아야 하나, 고민만 하다 입을 못 떼기를 몇 초. 그리고는 병원에서는 치료에 최선을 다할 거라는 문장에 필요하실 때 언제든 불러 달라는, 하나 마나한 말을 꽤 진심을 담아 덧붙이고서 병실을 나왔다.